노무현과 차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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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후. 소설가 / 시인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 네 번 도전해서 당선됐다.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 대통령 도전 십 육년 만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베네수엘라 차베스(Hugo Chavez, 1954∼2013), 십 오년 만에 대통령 됐다. 노무현(盧武鉉, 1946~ 2009)은 어떤가?

노무현은 1988년 정계에 입문하여 청문회스타로 등장한다. 1990년 3당 합당 선언에 불참하고, 1992년 부산 동구에 출마하여 낙선하고, 1995년 다시 부산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한다. 1996년 서울 종로구에 입후보하여 낙선하고, 1998년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서울 종로구에 출마하여 6년 만에 국회에 복귀한다. 이어 대통령에 당선된다.

차베스는 자신의 카리스마와 투박한 연설 스타일을 통하여 빈곤·노동 계급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1998년 5월과 8월 사이에 차베스의 지지도는 30%에서 39%로 급상승하였다. 계속 인기가 상승하면서 최고 권좌에 오른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는 노무현이 차베스를 닮았다고 했다. 노무현이 베네수엘라의 유고 차베스와 반미·반국제화의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는데, 그 닮음이 공존한다. 직설적인 화법과 민중의 도움으로 권좌를 되찾았다는 점. 노무현에 대한 탄핵소추가 국회에서 통과되었을 때, 베네수엘라에서는 국민소환제에 의해 차베스는 국민투표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탄핵소추를 무혈 쿠테타로 보고 분노했던 것처럼, 베네수엘라의 국민들도 자본가들에 의한 국민소환에 분노했다. 노무현에 대한 탄핵소추는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되었고, 차베스에 대한 국민소환은 국민투표에 의해 좌절되었다. 너무나 닮은꼴이다.

요즘 남북 관계가 자기 기준으로만 판단하는 마당에 엉뚱하게 우고 차베스가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차베스는 대통령 재임 당시 남북을 드나든 진보적인 인물이다. 1999년 네 번째 대선에 당선된 차베스는 한국을 방문해 김대중과 만났다. 무슨 얘기를 나눴을까? 모른다. 하지만 김대중은 차베스의 관점에서 볼 때 미국 제국주의의 똘마니였다.

김대중이 차베스의 동맹자가 됐다면 아마도 한국 운전자들은 지난 10여 년간 반값 석유를 즐겼을지도 모른다. 차베스는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차베스의 반미 성향으로 대한민국과의 관계는 소원한 편이었다. 대신 북한과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가졌다.

그래서 베네수엘라의 변혁을 이끌며 남미 좌파연대의 맹주로 군림했던 차베스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인민의 호민관’, 그리고 ‘포퓰리스트에 불과한 독재자’. 과연 차베스는 무엇을 이루었고, 무엇을 잃었을까. 차베스와 노무현, 누가 성공한 정치인이고 누가 실패한 정치인일까.

차베스가 일단은 성공했다는 것은 석유로 벌어들이는 돈을 소수 자본가가 아닌 대다수 서민들에게 골고루 분배했기 때문이다. ‘일단’이라는 단서가 붙는 것은 석유팔이에 의존하는 방식은 외부환경 변화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아태경제협력체(APEC) 회의와 관련해 자신은 빈곤국가 편을 들겠다고 공언했다. APEC 회의에서도 “부국과 빈국을 가르는 사회적 불평등 문제에 제동을 걸기 위한 이니셔티브를 제안할 계획”이라고 밝혔다는 데서 그렇다. 바로 이 대목은 차베스가 입만 열면 내뱉던 말이기도 하다.

차베스와 노무현은 그들의 처지에 맞게 이해해야 한다. 각국의 정치상황에서 카리스마가 필요했던 차베스와 합리성이 필요했던 노무현은 각자 최선을 다했다. 그렇지만 노무현은 어려웠을 것이다. 자신의 지지기반을 배반해야 하는 숙명 때문이다. 그리고 남한에는 레드 콤플렉스가 뿌리깊은 사회라서 더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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