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 호칭에 관한 소고(小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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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前 제주도문인협회장
관습이 그랬을까.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여인에 대한 호칭이 온당치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조선중기 이전에는 아예 이름(本名·본명)이 없었다. 사람에게 이름이 없었다니 이상한 일이다. 그러니 여인을 김씨, 이씨, 박씨, 강씨라 할 수밖에….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몇 안되는 여인들의 경우를 들여다보면 그게 이름이 아닌 것을 알게 된다.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 허균의 누이 허난설헌, 사도세자 빈이요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 숙종의 인현왕후 민비, 경종의 생모 장희빈, 의유당관북유람일기 중 동명일기로 유명한 의유당 연안김씨….

이 중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의유당 연안김씨(나중 南씨로 고증됨)는 거처하던 집을 일컫는 당호다. 집을 ‘당(堂), 헌(軒)’이라 한 것이다. 당호에 성을 앞세웠다. 인현왕후는 왕후를, 장희빈 또한 희빈이라는 신분을, 혜경궁도 궁호를 붙였다. 모두 평범한 여인들이 아니다. 그나마 구중심처인 궁중 비사의 주인공이거나 당대의 재원으로 지금도 회자되는 명작을 남긴 출중한 당대 여류문인들이다.

허난설헌의 전기를 보면 당호 이전에 본명을 초희(楚姬)라 한 것이 눈길을 끈다. 본가가 조선시대에 한때 세도를 누렸었다는 얘기인가. 선조 때의 인물인데 당시 여인에게 본명이 있다는 것은 흔치 않은 사례로 꼽힐 만하다.

제주가 낳은 의녀수반 김만덕의 경우는 다르다. 생존했던 시기가 선조에서 정조에 이르는데(1739년~1812년) 당시가 얼추 조선의 여인들이 이름을 갖게 되던 때가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허난설헌의 본명 초희도 궤를 같이 할 것이다. 1795년 폭풍과 폭우로 제주 백성들이 굶어 죽는 사람이 늘자 재산을 구휼미로 내놓아 만백성을 구한 김만덕의 이타행은 후세에 칭송 받을 만한 만대에 빛날 업적인데, 입궐해 정조를 알현하기도 했으니 당초 이름을 갖게 됐으리라. 김만덕 의녀는 호적에 여성의 이름이 등재되던 전환기라 호적에 정식으로 올렸지 않을까.

조선시대에도 기녀들에게는 대부분 이름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춘향과 춘향 모 퇴기 월매가 그렇고, ‘묏버들 가지 것거’의 시조를 남긴 홍랑을 비롯해 명월, 춘심, 화월 같은 기명이 줄을 잇는다.

고대소설의 숙영낭자전, 옥단춘전, 운영전의 ‘숙영, 옥단춘, 운영’은 소설 주인공 의 어여쁜 이름이지만 허구 속 가공인물이므로 문제될 게 없을 듯하다. 옥황상제에게서 오곡의 씨를 가져와 농경신이 됐다는 세경본풀이 주인공 자청비(自請妃)는 제주신화 속의 인물이니 예외다.

조선시대의 호적에서 여자인 경우, 호주 처의 성·연령·본관만 적고 있어 이름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도 여자의 이름을 부름에 남자하고 다른 면이 있어 더욱 문제다. 아잇적에야 ‘영희야, 순자야, 정숙아’하고 부르니 남자아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어른이 되면서 그 호칭이 흔들린다. ‘000의 처, 00의 엄마’ 식이다. 물론 남자라고 그렇게 불리지 않는 건 아니나, 사회활동을 많이 하므로 이름을 버젓이 부르는 경우가 훨씬 많으니 그 사람에 그 이름이 붙어 다닌다. 여자는 남존여비 사상의 잔재 때문인지 아직도 남자에 미치지 못한다. 이름이 아주 덜 불린다는 얘기다.

여권신장이다, 여성상위시대다 하기 이전에 진즉 앞세워야 할 것이 여성 이름 제대로 부르기가 아닌가 싶다. 그렇게 되려면 일정 수준 사고의 전환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또한 한두 사람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닌, 사회 일반에 의한 인식 변화가 이뤄져야 하는 일이다.

밥상머리 교육도 한몫 거들어 나서야 하리라. 요즘 조부님은 알되 아버지의 어머니인 조모님의 존함을 알고 이는 아이가 몇이나 될는지. 그냥 간과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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