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비어 있는 것들을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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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열기가 지구촌을 달구면서 총성 없는 세계대전이 독일에서 벌어지고 있다. 세계인들은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월드컵 축제를 통해 억눌렸던 감성을 토해낸다. 그들이 월드컵 축구에 그토록 열광하는 것은 그 기간만이라도 일상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 어느 하나 시원한 거리가 없는 답답한 현실은 우리를 숨 막히게 하고 열 받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기회만 주어진다면 상당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일상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한다.

생명을 가진 것들은 숨쉴 수 있는 시간적 빈틈과 공간적 빈틈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서는 비어있는 시간과 비어있는 공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비어있음(空·虛·無)’은 인간다운 생활을 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백리를 넘게 숨 가쁘게 달려온 마라토너에게 쉬는 시간은 그저 낭비하는 시간이 아니다. 그리고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뒤덮인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비어있는 녹지공간은 그저 쓸모없는 땅이 아니다. 그들에게 그러한 시간과 공간은 가장 달콤한 시간이요 절실히 필요한 공간이다.

현대는 빠름(速)과 있음(有)과 채움(實) 중심의 사회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다 잘 살기 위해서는 거기에 느림(遲)과 없음(無)과 비움(虛)이 추가되어야 한다. 근대인들이 노동과 생산 위주로 살아갔다면, 현대인들은 여가와 오락 위주로 살아간다. 시끄러운 도시에서 바쁘게 채우는 생활에 신물이 난 사람들은 돈과 시간을 바치면서라도 조용히 쉬면서 비워내고 덜어내는 기회를 찾으려고 한다. 따라서 그러한 현실을 잘만 활용한다면 또 다른 경제 모델을 창출할 수 있다. 즉 빠름과 있음과 채움 위주의 경제도 있지만, 느림과 없음과 비움 위주의 경제모델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경제를 살리면 환경이 죽고, 환경을 살리면 경제가 죽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인가 이번 지방선거에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경제를 살리겠다는 데는 한 목소리를 냈지만, 환경을 살리겠다는 이야기는 아예 찾기조차 힘들었다. 그러나 경제와 환경은 모순관계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경을 살리면서 동시에 경제를 살릴 수 있는 길이 있다. 개발이 빠름과 채움과 넘침 위주의 경제로 가는 것이라면, 환경을 잘 보전하자는 것은 느림과 쉼, 비워냄과 덜어냄 위주의 경제로 가자는 것이다.

앞으로 제주도는 일상에서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고, 가득 찼던 것을 천천히 덜어내고 비워내는 기회를 제공하는 경제모델에 승부를 걸어볼 필요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개발되지 않고 비어있는 곳들을 골프장과 리조트로 가득 채울 게 아니라 자연 저 그대로의 상태로 남겨 두어야 한다.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제주의 곶자왈, 오름, 해안 등은 개발 예정지가 아니라 그 자체가 가장 귀한 보물들이기 때문이다. 환경을 잘 보전하자는 것은 비어있음의 유용성을 강조하는 것이고, 느림과 쉼, 비워냄과 덜어냄 위주의 경제를 통해 지금보다 더 잘 살아보자는 것이다.

관광객들이 제주도에 오는 대부분의 이유는 빠름과 채움과 넘침을 즐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천천히 쉬면서 덜어내고 비워내기 위해서이다.

이제 곧 제주특별자치도가 출범한다. 제주특별자치도지사와 의원들은 제주도의 경제를 살리는 길은 개발을 통한 빠름과 채움과 넘침 위주의 경제모델만 있는 게 아니고, 환경보전을 통해 느림과 쉼, 비워냄과 덜어냄 위주의 경제모델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길 바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두 길 가운데 어떤 길로 갈 것이냐는 전적으로 제주도민들의 의지에 달렸다는 것이다.<윤용택 제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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