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섬 탈출 잔혹사와 미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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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택. 제주도교육청 장학관. 수필가
도민 60만 명 시대를 맞은 제주는 고립무원의 절해 고도였다. 인구 변천사로 제주의 어제를 들여다본다.

탐라국 시기 8000명, 고려 중기(원종) 1만명, 조선 초기(세종) 6만명, 이형상 목사의 ‘남환박물’(1703년)에는 4만3515명으로 적혀있다. 유사 이래 늘던 인구가 250년 전보다도 줄어들다니?

‘고려사’에 의하면, 제주는 송상과 왜인이 수시로 왕래하는 곳으로, 원종 9년(1268년)에는 탐라에 1백 척의 배를 만들도록 명했다. 탐라에서 제주로 이름이 바뀐 조선시대, 제주는 동아시아를 무대로 펼치는 해상교역에서 자취를 감춘다.

임란을 전후해 지나친 조세·진상품·군역, 탐관오리 수탈, 왜구 침입, 식량난까지 겹치자 도민들은 제주섬을 도망치듯 탈출한다.

인조 7년(1629년), 도민 수가 급격히 줄자 섬에서 뭍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는 출륙금지령을 내린다.

“근년에 제주고을의 인민들이 처자들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경상도·전라도 바닷가 연변에 옮겨 정박하는 자가 수천여 명이고, 수탈을 피해 육지로 간 제주포작(鮑作, 어부)인은 1만여 명에 이른다”고 역사는 전한다.

금지령 해제(1823년) 이후인 1884년, 제주 인구는 9만명이었으나, 의료 기술에 힘입어 1925년 20만5478명, 1938년 20만3651명, 1944년 21만9548명으로 증가한다. 그러다 1945년에는 27만6148명, 특히 해방 후 4·3 직전에는 30만명으로 늘어난다. 여기에도 잔혹사가 숨어있었다.

일제에 의한 제주섬 군사시설은 1926년부터 시작된다. 1945년 초 일제는 본토가 아닌 제주에서 미군과의 최후결전에 대비하는 결7호작전을 수행한다. 8만 여 일본군은 섬사람들을 혹사하며 도 전역에 엄청난 진지를 구축한다. 1945년 5월, 미군 공격을 피해 육지로 피난하던 여객선이 폭격을 당해 280명이 사망하고, 미군 폭격에서 살아남기 위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제주섬을 탈출한다.

1945년 8월, 해방을 맞아 섬을 떠났던 사람들이 대거 귀환한다.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 아무런 생계대책 없이 돌아오고, 좌·우익 이념 충돌과 외부 세력의 가세로 제주섬은 폭발 직전의 화산도로 변해간다.

제주섬을 피로 물들였던 뼈아픈 역사, 해방과 함께 밀물처럼 왔다가 4·3으로 썰물처럼 떠난 사람들….

20여 만명으로 급감했던 제주 인구는 6·25 피난민 유입 등으로 1955년에는 28만8781명으로 불어난다.

4·3 이후에도 상당 수의 제주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다.

재일교포 수의 4분의 1인 15만명이 제주 출신이라니. 남·북한 인구에서 제주가 차지하는 비중이 150분의 1임에도 일본에 유독 제주인이 많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이유다.

‘사람도 제주로, 말도 제주로!’란 말이 새롭게 회자되고 있다. ‘글로벌 제주, 교육의 힘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수능 4년 연속 최우수, 청렴도 3년 최우수 등의 성적을 거둔 제주 교육도 한 몫 거들고 있다.

또한 여러 지역에서의 학교 살리기 사례에서 보듯, 마을에서 제공하는 정주시설 등에 힘입어 적지 않은 외지인들이 제주로 삶의 터전을 옮기고 있고.

최근의 인구 증가에서 제주의 밝은 미래를 보듯 제주섬 잔혹사에서도 교훈을 배우련다.

제주의 젊은이들이 대학 진학 차 또는 새로운 세상을 찾아 제주섬을 떠나고 있다. 제주인의 정체성도 갖고 가기를 기원한다. 제주의 젊은이들이 제주를 알고, 사랑하고, 세계를 누비며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돕는 일은 우리의 숭고한 몫이다.

훗날 그들에 의해 제주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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