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주벽립’(曾朱壁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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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후. 소설가. 시인
‘중주벽립’(曾朱壁立), 증자와 주자가 벽에 서 있는 것처럼 내가 학습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일찍 증(曾), 붉을 주(朱), 벽 벽(壁), 설 립(立). 네 글자는 종로구 명륜동 1가 55번지 99호에 있는 거대한 암벽에 각자(刻字)돼 있다.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경저(京邸)가 있던 곳이다.

‘증주벽립’ 필적은 오현단에도 있다.

오현단의 ‘증주벽립’은 서울 성균관에 있는 우암 송시열의 글씨를 탁본해 새겨놓은 것이다. 송시열은 1백여 일 동안 제주도에 유배됐으며, 후에 귤림서원에 배향됐다.

오현단 서쪽 병풍바위에 1856년 판관 홍경섭(洪敬燮)이 새긴 송시열의 필적 마애명(磨崖銘)이 바로 그것이다. 증·주는 공자의 제자인 증자(曾子, B.C. 505∼B.C. 436)와 송대(宋代)의 대표적 학자인 주자(朱子, 1130∼1200)를 가리킨다.

증자는 일찍이 공자의 말을 인용해, “스스로 반성해 이롭지 못하다면 상대가 비록 보잘것 없는 천한 사람이라도 어찌 그를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스스로 반성해 내가 의롭다면 상대가 비록 1000만 명이라도 나는 ‘겁내지 않고 나의 길을’ 갈 것이다”(自反而不縮 雖褐寬博 吾不췌焉 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孟子公孫丑上)라는 말을 남겼다.

주자는 자신의 학문이 위학(僞學)으로 몰릴 때에도 동지들과 함께 강학(講學)에 열중하면서, “이제 나에게 화를 피하라는 말을 하는 것은 본래 서로 아끼는 마음에서 한 말이기는 하다. 그러나 내가 저 만길 되는 높은 절벽처럼 ‘온갖 풍상에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서서 버틴다면 오도(吾道)를 밝히는데 일조가 되지 않겠는가”(今爲避禍之說者 固出於相愛 然得某壁立萬인 豈不益爲吾道之光-朱子年譜別本寧崇三年條)라는 말을 했다.

1772년(영조 48) ‘우암송선생적려유허비’(尤庵宋先生謫廬遺墟碑)가 세워졌는데, 제주도 유배생활이 자세히 적혀 있다. “귀양이 풀린 다음 고을 선비들과 옛터를 찾아보고 탄식해 말하기를 선생의 성대한 도덕과 위대한 업적으로써도 백년이 채 못 돼 그 자취를 찾기가 어려우니 사림의 부끄러움이 아닌가 하므로 삼읍의 선비들이 의논해 짧은 비석을 세워 표시함에 목사 양세현 사도가 도움을 주었다. 옛어른들이 이르기를 선생께서 귀양살이를 할 때 다른 일은 별로 없었고, 고을 향교의 경전을 가져다 읽었다.”

조선 중기 성리학의 큰 인물이며 노론의 최고 지도자였던 송시열. 80평생을 치열한 당쟁의 와중에서 기폭을 되풀이했던 송시열. 그는 서인에서 남인으로 바뀌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83세의 나이인 1689년(숙종 15) 제주도로 유배됐다.

조선시대에 유배되거나 방어사로 부임해 제주도의 교학 발전에 공헌한 다섯 분, 오현(五賢). 오현은 1520년에 유배된 충암(沖庵) 김정(金淨), 1534년에 목사(牧使)로 부임한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1601년에 안무사로 왔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614년에 유배된 동계(桐溪) 정온(鄭蘊)과 1689년에 유배된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등이다.

송시열은 어떠한 역경을 만나더라도 증자와 주자처럼 굽히지 않고 자신의 소신대로 살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으로써 ‘증주벽립’ 네 글자를 자신의 집 뒷뜰의 언덕에 새겨 놓았다.

무더운 여름 어느 날, 벗들과 더위를 피하려고 오현단을 찾았다. ‘증주벽립’(曾朱壁立)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 각석(刻石) 앞에서 조선 중기 혼란한 정국에서 증자와 주자처럼 소신을 굽히지 않고 밀고 나가겠다는 우암 송시열의 의지가 보이는 글씨 앞에 섰다.

지금도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의지를 굽히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 때문에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며, 세상은 살맛나는 곳으로 변모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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