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건축기본계획,‘제주다운 건축’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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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민. 제주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우리나라의 소주는 똑같은 주정을 이용해 만든다. 단지 희석하는 방법에만 약간의 차이를 두기 때문에 서로 다른 브랜드일지라도 술맛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 보니 어디서 만들어지든 같은 브랜드의 소주라면 알코올 도수와 맛에서 차이가 있을 리 없다. 이처럼 소주는 생산하는 사람이나 고유한 지역적 특성이라는 가치가 반영되기 어려워, 찍어내듯이 양산되는 아파트와 같이 획일적이고 개성 없는 건축물에 비유된다.

반면에 좋은 건축물은 전통주와 같다.

전통주는 같은 종자의 곡물이라도 생산되는 땅에 의해서, 같은 종자에 같은 땅일지라도 그해의 기후나 술을 담그는 사람에 따라서 맛이 달라진다.

하늘과 땅과 인간이 함께 빗어내는 세상에 단 한 종류밖에 없는 술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양성과 독창적인 풍미를 보유하고 있다는 게 좋은 건축물과 흡사하다.

20세기 들어 본격화된 모더니즘 건축은 ‘공간’을 중요시했다. 하나의 대지 위에 세워진 건축물이 얼마나 크고 높은지 그래서 얼마나 큰 공간을 형성하는지가 건축을 평가하는 기준이기도 했다.

모더니즘 건축으로 인한 폐해는 발원지인 유럽보다 후발주자였던 아시아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났다.

서구화를 지상과제로 삼은 아시아의 도시들은 기존의 생활 터전을 깔끔하게 밀어버리고, 규격화된 공간의 건축물을 건설했다. 그 결과 인간은 사라지고 면적과 높이 등 수치만으로 표현되는 획일화된 건축물로 이뤄진 도시가 양산된 것이다.

현대건축의 새로운 흐름은 이젠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다. 도시에는 그곳을 살아온 사람들의 다양한 시간이 적층돼야 한다.

이탈리아 베니스나 피렌체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손꼽히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시대를 이어온 낡은 건축물이 만들어낸 꼬불꼬불한 골목길마다 다양한 사건과 삶의 흔적이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살아있는 도시를 만들려면 ‘시간’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세련된 디자인의 건축물, 랜드마크적인 건축물에만 매료되지 말고 추하든 아름답든 우리의 삶을 인정해야 한다. 더럽거나 낡은 것, 사람들의 자취가 만들어 낸 흔적을 받아들이고, 이를 개·보수하며 새로운 삶을 입히는 것이다.

이는 ‘정체성’과도 통한다. 정체성은 사찰이나 기와집 같은 전통건축의 문제가 아니다. 허름하고 볼품없는 건물일지라도 그곳에 사는 이들의 고유한 흔적과 숨결이 배어 있다면 그것이 바로 건축의 정체성이다.

제주인의 삶과 문화를 반영한 건축, ‘제주다운 건축’을 만들기 위한 길이 열렸다.

‘제주건축기본계획’이 드디어 완성된 것이다. 이번에 제주특별자치도가 마련한 제주건축기본계획은 도시·건축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건축분야의 최상위 기본계획으로, ‘제주다운 건축’을 만들기 위한 초석이 될 것이다. 제주건축기본계획은 ‘건축문화와 함께하는 품격도시 제주’라는 비전 아래 건축·도시 공간의 품격 향상, 친환경 건축·도시 조성, 창조적 건축문화 창달 등 3대 목표와 이를 달성하기 위한 21개 과제로 구성됐다. 그 과제 중에서 첫 번째가 ‘제주건축의 정체성 확립’을 통해서 ‘제주다운 건축’을 구현하는 것이다.

요즘 만들어지는 건축물들은 제주의 정체성을 반영하려는 노력보다는 경제적 논리를 우선해 획일화된 형태로 설계돼 제주의 고유한 특성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제주의 땅은 풍광, 환경 등 주어진 조건이 지역마다 너무나 다르다. 당연히 서로 다른 건축물이 나와야 할 것이다.

그 땅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특성을 간직한 ‘제주다운 건축’으로 말이다. 제주건축기본계획에서 추구하고 있는 ‘제주다운 건축’은 제주의 지역적 맥락에 깊은 뿌리를 두고 보편성을 구현하는 노력을 통해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되새겼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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