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들러 같은 중재자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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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준. 前 제주문인협회장/희곡작가
   
명화는 몇 번을 보아도 감동을 준다. 며칠 전 우연히 스탠리 카우프만이라는 영화평론가가 쓴 글을 보고 ‘쉰들러리스트’라는 영화를 다시 보았다.

오스카 쉰들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많은 얘깃거리를 지녔지만 그의 관심은 나치 당원인 쉰들러가 왜 1100여 명이나 되는 유태인을 구했는가 하는 점에 있었다. 쉰들러는 수용소 소장을 비롯한 비밀경찰들을 매수해서 폴란드계 유태인들을 공장 직원으로 고용한다. 그리고 유태인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그릇과 탄환 등 군수품을 만들어 납품하고 거부가 되었다.

그런데 쉰들러가 변심을 하게 된 동기나 이유에 대한 설명이 없다. 아무리 영화라지만 어떤 계기 없이 주인공의 성격이나 행동이 변화하는 것은 통일성이나 완성도 면에서 치명적인 결함이다.

그러나 카우프만은 영화에서 나타난 강조점의 회피가 오히려 이 작품을 연출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천재성에 기인한다고 칭찬하고 있다. 즉 쉰들러의 선의를 설명할 수 없는 미스터리로 남겨둔 것은 나치들의 야만성이 설명될 수 없는 것과도 같고 이 두 가지 사실이 이 영화의 진정한 주제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필자는 영화를 보면서 쉰들러가 훌륭한 중재자라는 잠에 주목했다.

영화 ‘쉰들러리스트’의 압권적 장면은 마지막에 나온다. 나치는 항복을 하면서 수용소에 있는 유태인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때 쉰들러는 공장의 강당에 모인 유태인 노동자들을 향하여 ‘이제 전쟁은 끝났으며 이제 여러분들은 자유로운 몸이 되었고, 자신은 도망자의 몸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때 총으로 무장한 독일군 장병들은 2층 발코니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쉰들러는 그들에 대해 연설한다. “저는 당신들이 유태인 노동자를 모두 없애라는 명령을 상부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한 인간으로 고향에 돌아가겠습니까? 살인자로 돌아가겠습니까? 이 한 마디에 병사들은 하나둘씩 그 지리를 떠나고 만다. 쉰들러는 나치 당원의 입장에서 유태인과 독일군사이를 훌륭하게 중재한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이해를 달리하는 집단끼리 극한적인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청와대와 여야 대립이 그렇고, NLL과 국정원 문제, 밀양 송전탑 문제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제주 사회만 하더라도 강정 해군기지 문제가 몇 년 째 반대하는 주민과 국책사업이라고 강행하는 해군과의 마찰로 해결점이 보이지 않는다. 제주출신 원로 작가의 필설로 재점화된 4·3문제도 진상보고서까지 채택되었지만 진보와 보수의 시각차는 여전히 불씨로 남아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공약으로 내건 국민통합이 쉽게 성취될 수 없는 것은 쉰들러와 같은 진정한 중재자가 없기 때문이다. 권력을 쟁취한 자가 자기편의 사람을 중재자로 내세우면 통합은 결코 승리하지 못한다. 승자독식의 사회풍토라 중재자를 찾기가 더 어려운 지도 모른다. 사회의 원로요, 어른이라는 사람들이 선거 때만 되면 출마하겠다고 나서거나, 기웃거리며 줄을 대고 편 가르기 하는 사회구조에선 중재자가 나오기 힘들다.

예전엔 김수환 추기경과 같은 종교인이 중재자 역할을 했으나, 요즘엔 종교지도자들도 한쪽 편을 지지하고 있어서 완충적인 역할을 하기가 곤란하게 되었다.

영화 ‘쉰들러리스트’에 답이 있다. 쉰들러는 권력편에 있으면서 약자를 위해서 배려하고 희생하면서 자기편을 설득했기 때문에 훌륭한 중재가 가능했다. 강자가 독식하고 압승하려고 하면 종국엔 지지 않으려고만 하는 편에게 필패하는 게 역사의 교훈이란 걸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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