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돌담에 대한 역사적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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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택. 한림공업고등학교 교장. 수필가.
제주의 마을 이름에 가장 많이 들어간 단어는? 성(城)이다.

월성부락과 무근성, 고성, 봉성, 금성, 성산, 성읍, 보성, 인성, 안성 등 이 마을들의 공통점은 돌과 관련 있다는 것이다.

화산섬 제주는 돌무더기와 바람이 많은 척박한 환경이었음에도, 선인들은 돌을 십분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밭담, 울담, 축담, 올렛담, 산담, 잣담(성), 원담, 불턱(담), 진성 등 다양한 성의 돌담이 이를 웅변한다.

이러한 돌담들을 보는 재미로 출·퇴근길이 즐겁다.

한림읍 귀덕리 성로동의 밭담은 더욱 특이하다. 귀덕리의 옛 이름은 석천촌인데, 돌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는 촌락이란 의미의 고어에 더 애정이 간다.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지방기념물인 명월진성이 있다.

이 지역은 1270년대에 삼별초에 이어 여몽연합군이, 탐라국을 100여 년간 통치한 몽고군이, 목호들을 물리치기 위해 최영 장군이 상륙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그리고 을묘왜란과 임진왜란을 전후한 일본인들의 노략질과 4·3의 아픈 역사가 배어 있는 비극의 현장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전후해 제주선인들은 환해장성, 성담, 잣성 등을 축조하는 데 동원됐을 것이다.

필자의 출·퇴근길도 어쩌면 당시의 전투 현장이었을지도 모른다.

비양도 주변의 해안가로 상륙하는 수만의 군졸들을 실은 전함들과 돌담을 방패로 해 일진일퇴하는 병사들을 부질없이 그려본다.

이원진 목사가 쓴 탐라지에는, “밭 사이에 경계가 없어, 힘센 자들이 약한 자의 토지를 잠식하기에, 김구(고려시대 제주 판관)가 지역민들의 고충을 듣고, 돌을 모아 담을 쌓고 경계선을 구분 지으니 지역민들이 편하였다”라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거친 바람으로부터 흙과 씨앗을 보호하기 위해 밭에서 골라낸 돌들로 밭담을 쌓는 일은 농경과 더불어 시작됐을 것이다.

돌담 중 잣백담 또는 머들(돌무더기)은 농경문화 이래 밭에서 캐낸 돌들을 성처럼 쌓아올린 담이고, 잣성은 조선초기부터 한라산 지역에 설치된 목마장의 경계에 쌓은 담이다.

환해장성은 고려시대부터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해안선을 돌아가며 쌓았던 성담이다.

하지만 읍성, 현성, 진성 등의 성담들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항만공사 등으로 매몰되고 말았다. 허무한 역사의 한 단면이다.

일본의 역사소설가인 ‘시바 료타로’는 1986년 펴낸 탐라기행에서 “오래된 집들이 땅에 납작 웅크리듯 있는데, 이는 바람을 피하기 위해서다. 또한 바람막이를 위해 돌담으로 에워쌌다. 돌담은 틈새가 많다. 살며시 밀기만 해도 허물어질 것 같은데, 끄떡없이 견디니 참으로 명인의 솜씨랄 수밖에 없다”라며 제주 돌담에 대한 감상을 적었다.

제주를 2회에 걸쳐 방문한 ‘25시’의 작가 게오르규는 “제주가 제주다운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돌담집과 울담, 밭과 밭을 구획하는 밭담 등은 제주만의 명물이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척박한 자연환경을 지혜롭게 극복한 선인들의 개척정신의 산물인 돌담에서 필자는 제주인의 정체성과 향토성 그리고 예술성을 느낀다. 그리고 제주 미래의 숨결을 듣는다.

2006년 문화관광부가 선정한 100대 민족문화상징에 제주 돌담이 초가집과 더불어 선정됐고, 올해에는 국가 중요농업유산 제1, 2호로 ‘완도 청산도 구들장 논’과 함께 ‘제주도 흑룡만리(黑龍萬里) 돌담밭’이 지정됐다.

제주도는 계속해 돌담밭이 세계농업유산에 지정되기 위해 신청 중이다.

‘흑룡만리’ 돌담의 미학이 외국인 관광객 500만명 시대의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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