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소규모 가구공장에서 출발 현재 27개 가구점 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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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물 거리를 찾아서...도내 최대의 가구 상권 '서문가구거리'>
   
1969년 가구공장 2곳이 들어선 이후 현재 27개의 가구점이 밀집해 도내 최대 가구 상권으로 부상한 ‘서문가구거리’ 전경.
제주시 용담1동 ‘서문가구거리’는 45년 전인 1969년 소규모 가구공장 2곳에서 출발, 현재 27개의 가구점이 들어섰다.

250m에 이르는 이곳 거리에는 다양한 브랜드의 가구점과 주문 제작공장, 수리점이 자리를 잡았다. 저렴하면서 뛰어난 품질을 자랑하는 가구를 판매해 명성이 자자하다.

도내 최대의 가구 상권답게 장롱·화장대·소파·침대·서랍장에서 사무용 및 유아용 가구를 비롯해 작은 소품도 쉽게 구입할 수 있다.

신혼부부가 왔다가 아이를 낳은 후 오고, 백발이 된 후에도 다시 찾는 등 단골이 여전한 비결은 뭘까?

   
                강정래 상인회장
36년째 장사를 하고 있다는 강정래 서문가구거리 상인회장(65·)은 “거품을 뺀 가격과 품질에 대한 믿음을 심어줬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해외 유명 브랜드의 가구도 따지고 보면 원목은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 중국에서 수입한다. 여기에 상표값을 더해 비싸게 팔고 있다는 것.

하지만 서문가구거리는 중저가 브랜드로, 같은 가구이지만 저렴하고 착한 가격에 팔면서 단골을 꾸준히 확보하고 있다.

강 회장은 “홈쇼핑과 인터넷에서 사전에 가격과 정보를 입수한 주부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선 좋은 품질의 가구를 보다 저렴하게 판매할 수밖에 없다”고 장사의 비결을 털어놨다.

그런데 1970년대 초반까지 제주도는 ‘가구’를 자급자족 했었다. 카페리가 취항하기 전까지 육지에서 가구를 들여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작은 여객선은 사람만 실어도 꽉 차서 가구가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

한라산에서 느티나무(굴무기)와 먹구슬나무 등을 베어서 부엌 찬장이나 작은 서랍장을 만든 게 서문가구거리의 효시다.

이어 이불장과 화장대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서귀포지역 주민들은 소달구지로 끌고 5·16도로를 넘어와 가구를 구입해 가곤 했다.

자개장이 유행하던 1980년대에는 남원읍 태흥리에 사는 한 농민이 화물차 4대 분량의 감귤을 싣고 와 시장에 내다판 후 장롱·화장대·문갑 등 이곳에서 자개장 일체를 구입해 간 일화는 유명하다.

완성되기를 기다리며 근처에 있는 여인숙에서 하루 또는 이틀 동안 투숙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목재소가 곳곳에 생기면서 가구공장 사장들은 한라산에서 나무를 벌채하는 수고를 덜게 됐다.

조선시대 제주읍성 서문이 있었기에 ‘서문통’이라 불렸던 이곳은 과거 시외버스터미널과 민속오일시장이 들어섰던 중심 상권이었다.

나날이 발전을 거듭해 경기가 좋았던 시절, 서문가구거리의 연간 매출액은 100억원을 훌쩍 넘겼다. 장사가 잘 됐던 가구점은 하루 매출이 5000만원에 이르렀다.

세월이 흘러 옛 도심의 영광은 빛이 바랬으나 유독 서문가구거리 명성은 그대로다. 10월과 11월에는 특가 세일을 하는 등 상인 모두가 똘똘 뭉쳐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상인들은 또 버려진 가구를 고쳐 어려운 이웃에게 전달하는 온정을 베풀고 있다.

강 회장은 “도민들은 이사를 가면 옛 가구를 쉽게 버린다”며 “이곳에서 구입한 가구는 종류를 불문하고 수리가 가능하므로 버리지 말고 맡겨 달라”고 신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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