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들링(Hudd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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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시인 / 수필가
집단이 둥글게 커다란 원을 만든다. 그리고 침묵 속에 서서히 돌기 시작하고, 수천마리의 펭귄들이 이에 동참한다. 남극의 얼음을 무대로 연출하는 생명의 서사(敍事)는 이렇게 막이 오른다. 장엄하다. 남극의 눈 폭풍을 견뎌내기 위해 몸을 밀착시켜 한 덩어리가 되는 그들의 처절한 대응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무리에서 이탈하면 죽는다. 무시무시한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금세 얼어붙어 버리는 것이다. 새끼를 부둥켜안고 살아남기 위해 추는 거대한 필사의 원무(圓舞·허들링). 먹이를 구하러 바다로 나간 암컷을 대신해 수컷들이 알을 보호하며 벌이는 춤사위다. 절체절명, 그들에게 객석의 박수 따위는 한낱 사치일 뿐, 바라거니 오직 살아남는 것이다.

또 놀라운 게 있다. 빙글빙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돌아가는 원둘레에서 온몸으로 바람을 막고 있는 무리를 위해 일정한 시간마다 원의 안쪽으로 교대가 이뤄진다는 사실. 10도 차이, 밖의 언 몸들을 구심으로 끌어들이면서 순간순간 원심을 메워나가기 위해 원심으로 밀리는 몸놀림이라니. 펭귄들은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그렇게 집단이 하나로 흐른다. ‘함께 한다는 것의 힘’이 생명을 살리는 모습은 눈물겹도록 처연하다. 허들링은 그런, 가장 생명적 가치실현이다.

낭패하는 수는 왜 없을까. 허들링 중 수컷의 발등에서 떨어진 알은 생명으로 태어나지 못한다. 펭귄의 자식 사랑은 유별나다. 죽어버린 새끼를 인정하지 못하는 수놈 펭귄은 깨진 알을 계속 품다 알 크기의 눈덩이를 품어 보기도 한단다. 남극의 눈물이다.

두 달이 채 안됐을까. 드디어 부모의 품에 싸였던 펭귄 새끼들이 남극을 나들이하는 첫날이다. 양식을 구하러 바다에 갔던 어미들도 돌아왔다. 암수 펭귄들은 서로의 소리로 정확히 제 짝을 찾아낸다. 가족들의 찌릿한 만남이 이뤄지는 순간이다. 어미는 서둘러 몸 안에 저장한 먹이를 새끼에게 먹인다. 펭귄밀크, 위벽에 저장했던 먹이와 소화기관의 본부가 합쳐진 것이라 한다. 두어 달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가장의 책무를 다한 수컷들은 그제야 허기를 채우기 위해 바다로 떠난다.

부모 자식 사이에도 선을 분명히 긋는 그들이다. 새끼에게서 떠날 여름이 눈앞에 다가온다. 알을 겨울에 출산하는 이유가 있었다. 알에서 깨어 자랄 즈음 봄을 맞이하기 위한 생래적인 셈법이다. 펭귄들은 새끼를 얼음판 위에 그냥 내버린다. 적응해 혼자 살아가라고 뒤돌아서는 것이다.

섭씨 영하 50도. 눈보라 속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혹독한 남극의 겨울, 살아남기 위해 펭귄이 선택한 무기는 추위에 맞서는 신체구조가 아니다. 강인한 공격력으로도 태부족하다. 유일한 생존법이 허들링, 소통하는 것이다. 다리 짧은 펭귄에게서 한 수 배운다. 우리의 제안과 프레젠테이션에서도 수많은 청중과의 허들링, 고객 혹은 조직 내에서의 허들링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남극의 펭귄마을에도 유아원이 있는 걸까. 새끼펭귄들이 원을 그려 가며 빙빙 도는 데 열중하고 있다. 부모들이 먹이를 얻으러 간 사이 새끼들이 모여 허들링을 연습하는 광경이다. 그들 조상이 남극을 선택한 것은 필연이었다. 남극의 추위를 이겨낼 천적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추위만 이기면 된다는 걸 그 새끼들이 모를 리 없다.

사람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펭귄에게도 조기교육이란 게 있는 성싶다. 그런다고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다. 선험적인 것이다. 이쯤 되고 보면 만물의 영장이란 말이 우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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