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의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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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후. 소설가 / 시인
1951년 1월 18일이라면, 한국전쟁 당시 두 번의 싹쓸이를 거친 뒤이다. 낙동강만 남기고 거의 끝나는 것 같았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미군이 압록강·두만강까지 진격해 올라갔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여 서울을 내 주고 중공군의 남진(南進)을 죽을힘을 다해 막아내고 있는 시점이었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의 작품으로, 바로 1951년 1월 18일 상황을 그린 그림이다.

피카소는 한국전쟁에서 벌어진 미국의 잔학행위에 대해서 그림을 통하여 비판하였다. 그래서 ‘한국에서의 학살’을 발표하였고, 국제연합과 미국의 한국전쟁의 개입을 반대하였다. 그는 1957년에 제명되기까지 프랑스 공산당원으로 활동한 사회주의자이기도 했다.

독자 여러분들은 바로 기억할 것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의 표지를 장식했던 바로 그 작품 말이다. 당시 미군의 양민학살을 주제로 해서 ‘한국에서의 학살’을 피카소가 그렸다. 미군은 황해도 신천에서 임산부와 부녀자, 아이들을 산골짜기로 몰아넣고 집단 사살하였다. 그림의 오른쪽에는 총칼을 들고 총부리를 겨눈 군인들이 서 있고, 왼쪽에는 여인들과 아이들이 공포에 떨며 서 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의 학살’은 당시 프랑스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들에게 그렇게 환영받지 못했다. “도대체 저 군대가 어느 나라 군대인지 알 수 없잖나!”가 그 이유였다. 백인인지 아시아인인지도 모르게 얼굴들을 칭칭 투구로 싸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자유세계’로부터는 예술성이 없다는 비판은 기본으로 들어야 했다.

바로 그 신천대학살에서 신천군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3만5000명의 신천군민들이 죽어갔다. 우리 제주도민이 한국전쟁 당시 대전 골령골에서 학살당한 그 상황과 똑같다. 그런데 여기에 큰 물음표를 던져야 할 의문이 있다. 미군이 그랬다기보다는 오히려 교세가 막강했던 기독교인들과 좌익들의 대립 와중에 발생한 ‘우리끼리의 대학살’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우리는 제주4·3 당시 제주에서 만행을 자행한 서북청년회가 이북에서 넘어온 일부 기독교인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어쨌든 신천 대학살 소식은 동유럽과 유럽의 좌익들에게 전해지고 국제 취재진까지 구성되어 파견되기도 했다.

당시 학살은 황해도 신천뿐이 아니라 조선 팔도 전역에서, 남과 북에 충성하는 각각의 무력 집단에 의해 자행됐으며 피학살자들의 마지막 순간은 어김없이 ‘한국에서의 학살’ 바로 그 모습과 같았다.

그 와중에 남과 북의 백성들은 그야말로 부지기수로 죽어갔다. 물론 무력을 보유한 정규군들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제주4·3 당시 제주사람들은 인천형무소로, 대전형무소로, 목포형무소로 끌려가 한국전쟁으로 무참하게 정규군에 의해 죽어갔다.

피카소는 원래 좌익계 화가이다. 1944년 공산당에 입당, 소련으로부터 레닌 평화상을 받았으며 공산주의자들의 선전 재료에 이용되는 그림을 그린 화가이다. 평생 한국 근처도 와 본 적 없는 그는 지구 반대편에서 수만 명의 생명이 일시에 죽어갔다는 소식에 영감을 받아 ‘한국에서의 학살’을 그렸다.

피카소는 전쟁과 대량학살을 증오하는 그림을 많이 남겼는데, ‘게르니카’ ‘납골당’(1945), ‘한국에서의 학살’(1951), ‘전쟁과 평화’(1954) 등이 그것이다. 한국에서의 학살과 전쟁과 평화는 한국전쟁을 다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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