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고(渤海考)와 교지(校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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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련. 수산초등학교장 / 제주아동문학협회장
   
조선시대 실학자 유득공은 서자(첩의 자식)였다. 그런 출신이 조선시대 신분 상승의 걸림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거의 평생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개혁적인 사고를 하는 정조의 배려 덕이었다.

유득공은 474년의 고려사에, 발해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많은 영토와 역사적인 명분을 잃어버린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나머지 ‘발해고’를 엮었다고 한다. ‘발해고’의 중요한 가치는 우리 민족의 역사 무대를 발해의 영역이었던 만주 일대로 확장한 최초의 저서라는 데 있다. 신라의 통일을 강조하여 한국사의 판도를 한반도로 위축시킨 종래의 역사인식을 뒤로하고 발해와 고구려의 연계성을 인식하여 발해와 신라가 양립된 남북국 시대를 한국사 체계에 도입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을 것이다.

200년이 넘는 역사와 10만여 명이 넘는 발해유민이 있었음에도 발해가 요나라에 의해 멸망되고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가 될 때까지 우리나라의 땅이었다고 외쳤던 사람이 없는 것을 알고 발해의 역사를 복원하고 고증하기 위해 규장각의 책들을 섭렵하며 자료를 모으고 심지어 외국의 서적들까지 찾아 발췌하여 엮었다.

유득공은 ‘발해고’를 엮는 이유를 서문에 이렇게 밝히고 있다.

“(고려가)끝내 발해사를 쓰지 않아서 토문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지 못하게 되어 여진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고 거란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고려가 마침내 약한 나라가 된 것은 발해의 역사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크게 한탄할 일이다.”

이는 나라든, 기관이든, 조직이든, 개인이든 실재하는 동안의 주요한 사실들은 기록을 해두어야 한다는 소중함을 깨우쳐 주는 글이라 할 수 있다.

학교라는 단위기관의 역사를 기록하는 결과물은 교지이다. 학교에 따라서는 학교신문의 발행을 통해 기록으로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학교교육활동의 전반적인 기록은 묵직한 교지 형태여야 좋다고 본다. 학교신문은 보관에 신경을 써야 하지만 책 형태로 만든 교지는 보관도 용이하다. 우리 학교도 2013학년에 개교 64년 만에 교지 2호를 발행하였다. 수료식 날, 자기 작품이 실린 교지를 학생들에게 나누어주었을 때의 학생들의 훈훈한 표정들이란! 자기 글부터 찾아보고는 반듯하게 활자화 된 신기함에 기쁨이 가득하다. 친구들의 글들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자기와 다른 생각과 감정을 나누기도 할 것이다.

교지는 학생들의 다양한 종합 축제의 마당이라고 볼 수 있다. 학생들의 각종 작품을 수록하는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자아실현의 기회를 부여한다. 아울러 학생들의 소질 계발과 정서교육에 도움을 주고 학생, 교사, 학부모 등의 다양한 생각과 의견을 담아냄으로써 서로의 가치관과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이를 통해 새 학교 문화 창조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교지는 학교의 산 역사와 전통을 기록하는 소중한 역사를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1~2년, 어쩌면 짧은 시간 단위의 작은 기록이지만 50년, 100년 동안의 학교 발자취를 만들 때에는 아주 귀중하고 사실적인 사료(史料)로 긴히 쓰일 것임에는 틀림없다.

역사는 기록하고 보존하며 활용하는 자의 것인 만큼 교지 발행은 아주 중요한 학교행정의 핵이라고 보아진다.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할 수 없고, 기억할 수 없으면 결국 잊어버리게 된다는 명약관화한 진리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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