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문화에서 민심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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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학교 대우교수
   
국가와 사회의 흥망을 점친 것이 정치적 예언서이다. 이것이 역사기록에 등장한 것은 삼국시대 말부터였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자국의 멸망을 예고하는 징조가 빈번히 나타났다. 한 참 뒤인 후삼국시대에도 왕건과 궁예의 쟁패를 예언한 ‘고경참(古鏡讖)’이 출현해, 왕건의 승리를 예고했다. 유학자 최치원도 고려가 신라를 흡수하리라고 점쳤다 한다. 풍수도참설의 선구자인 도선(道詵) 대사는 한술 더 떴다. 그는 왕건의 나라 고려가 탄탄대로를 걸으리라고 예측했다.

고려 때에도 세상이 시끄러울 때마다 예언이 유행했다. 많은 사람들은 도선의 예언을 빙자하여, 고려의 수도 개경의 지기(地氣)가 쇠약해졌다고 말했다. 고려왕실로서 더욱 듣기 민망했던 것은, 이씨가 남경에 도읍한다는 예언이었다. 왕실에서는 남경에 오얏나무를 심어두고, 가지가 무성해지면 몽땅 베어버리기를 반복하였다. 그러나 14세기 말에는 이성계가 일어나서 결국 고려를 멸망시키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다. 왕조교체와 천도(遷都)를 바라는 민심이, 역사의 방향을 틀어버리고 말았다.

조선 중기 이후 사화와 당쟁이 격화되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발생하였다. 내우외환(內憂外患)이 거듭되자, 예언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하여 18~19세기는 사실상 ‘예언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특히 영조와 정조 때는 서북지방에서 출현한 ‘정감록(鄭鑑錄)’이 전국에 유행했다. 예언서를 구실로 ‘정감록 역모사건’까지 일어났다. ‘정감록 열풍’은 조선이 멸망하고, 일제의 강압적인 통치가 실시되자 다시 격렬해졌다. 예언서에는 민중이 느끼는 ‘현재의 고통’과 그것의 ‘미래 해결책’이 담겨있다. 예언서에는 문제들을 해결할 진인(眞人), 즉 구세의 영웅이 나타나, 안정과 평화를 구가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예언에 촉각을 곤두세운 것은 통치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언 때문에 민심이 요동치고, 그것이 결국 반(反) 왕조 활동으로 비화될까봐 전전긍긍하였다. 하지만 민중은 정치적 예언에 기대를 걸었다. 그들은 감시의 눈길을 피하여, 예언을 널리 유포시켰다. 상당수 민중들은 예언을 토대로 지하에 비밀조직을 구축하고, 왕조의 전복을 노렸다.

내가 보기에, 조선 후기 민중은 예언서의 창작에도 힘을 쏟았다. 민중은 자신들의 취향에 맞게 기왕의 예언서를 윤색하였다. 그것은 집단창작이라 불러도 좋을 수준이었다. 18세기 후반에는 ‘평민지식인’들이 그 일을 주도하였다. 평안도, 황해도 및 함경도 출신의 평민지식인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19세기 말이 되자 각지의 평민지식인들은 동학(東學)이라는 신종교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동학을 통해 한국사회를 총체적으로 혁신하려 했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이런 분위기를 웅변한다.

역사 속의 민중은 사회적 불의에 저항할 줄 알았고, 자신들의 기대에 합당한 지도자를 역사의 무대 위로 불러내기도 하였다. 천 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한국예언문화의 특질이 거기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사상 유례 없는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불안요소도 상당히 많다. ‘소셜 미디어’에는 현대의 사회적 병폐를 질타하는 분노의 목소리가 일렁인다. 물론 편향된 목소리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런 목소리까지도 송충이 떨구듯 함부로 취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만약 조선의 지배층이 ‘정감록’에 담긴 민중의 고통과 목마름을 똑바로 이해했더라면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 아닌가. 지금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문제의 근본은 언제나 똑같다.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에 하늘의 큰 뜻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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