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론] 머리를 깎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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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발은 어떤 사람의 인격이나 능력, 사회적 위치가 변화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머리는 신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관이다. 삭발은 신체적인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으면서도 용모의 변화를 크게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변화한 자기의 상징성을 부각시키기에 효율적이다.

여러 문화와 종교행위를 통해서 삭발은 의례로 발전해 왔다. 불교에서는 출가하여 불문(佛門)에 귀의할 때 긴 머리를 완전히 제거하는 삭발례를 행한다. 현재 가톨릭에서 부제품을 받음으로써 대신하지만 역시 평신도가 수도자나 성직자로 입문하는 의미로 삭발례가 거행되었다.

그런데 삭발례가 아닌 삭발식도 있다. 흔히 결연한 의지를 반영하기 위하여 삭발식이 거행되기도 한다. 특정 정당의 해체를 주장하는 삭발식, KTX 여승무원의 삭발식과 같이 데모를 하기 전에 참가자들의 강한 의지를 나타내기 위하여 삭발식이 거행된다. 아무튼 머리를 깎는다는 것은 뭔가 특별한 정신적 의미가 있는 행위이다.

FTA(자유무역협정)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과거에도 쌀 시장 개방이 논의될 때면, 우리나라 대표는 회의장 밖에서 삭발식을 거행했다. 이는 방송매체에도 빈번히 보도되었기 때문에 아마도 익숙한 광경일 것이다.

상대국 대표와 회의를 하러간 사람들이, 어떻게든 회의장을 지키고 논리와 설득으로 회의장에서 싸워야할 사람들이, 회의장을 벗어나서 머리를 깎는 것은 참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물론 결연한 의지를 보이기 위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상대국의 대표단 입장에서 보면 정말로 어리숙한 짓이다.

첫째, 회의장에서 논리로 협상을 해야 한다. 회의장을 비운다는 것은 너희 맘대로 하라고 방치한 것과 마찬가지다. 둘째, 결연한 의지를 보일 필요가 뭐가 있는가? 그저 잘 싸우면 그만이지. 이건 마치 기를 죽이겠다거나 이번 협상에서 실패하면 배라도 가를 것 같은 자세로 선전포고(?)를 하는 셈인데 이는 강짜를 부리거나 떼를 쓰는 것과 같다. 냉엄한 국제사회에서 전혀 통하지 않는 얘기다. 또한 상대국에서도 대표단 정도에 들어갈 사람이라면 이 정도에 기가 죽을 리 없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사람들이 왜 번번히 대표로 파견되어서 머리를 깎고 올까? 출장비 주고 월급주는 이유가 이들이 머리깎고 오라고 나라 돈을 주는 것인가? 이들은 이미 패배를 예감한 것이다. 협상에서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귀국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돌아와서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머리라도 깎고 오면 된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수준이 머리까지(?) 깎고 온 대표단에게 심하게 다구치지 않는 다는 것을 이들은 이미 알고 있다. 우리국민이 머리깎은 대표단에게 속지 않을 것을 분명히 안다면 이들은 감히 이렇게 국민을 속이려하지 않을 것이다.

FTA 협상에서 귤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 도의 관계자가 방미를 계획한다는 보도를 보고 나는 이런 삭발식을 떠올린다. 또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가지고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했던 이상설, 이위종 열사를 떠올린다. 이들이 배를 갈라 자결을 하였다는 얘기도 있고 그런 것이 아니라 분사했다는 얘기도 있다. 분명한 것은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하면 협상에 개입하지 못한다는 것은 당연한 얘기다.

회의장에 못들어 가더라도 세를 과시하고 시위를 할 수도 있다. 그런 목적이라면 농민이 가는 것은 괜찮다. 이미 국가대표가 파견되었는데 도의 관계자가 따로 간다면 이번엔 정부체면이 손상된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따로 노는 것이다. 도무지 사리가 맞지 않아 보이는 이런 일은 누가 생각해 냈을까?

<정범진 제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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