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론] ‘거들레기’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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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 다리를 접을 수 있는 절지동물. 단단한 등껍질은 없지만 갑각류 대우. 새우도 아닌 것이 게도 아닌 것이, 더구나 보말(고둥의 제주 사투리)도 아닌 것이, 보말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사는 집게. 일할 때나 쉴 때나 단단한 보말껍데기를 짊어지고 있어야 하는 기형 바닷게. 남의 집에 들어앉아 주인행세하고, 그나마 모자라 이집 저집 빈집을 찾아 헤매는 나그네. 집 크기에 몸을 맞추면 좋으련만, 몸의 크기에 맞는 집을 찾아다녀야 하는 생물진화의 부작용. 허나, 보말껍데기를 둘러썼다고, 소라껍질, 조개껍질 둘러쓴 집게를 구분할 줄 아는 타고난 능력.

보말을 잡아다가 삶아먹는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그득 안겨주는 거들레기. 양순한 보말인체 살려다가, 마지막 순간에 틀통나서 저 멀리 마당 구석으로 날리던지, 속빈 보말 껍데기 무덤 속으로 추락하는 종말. 어쩌다, 욕탕의 뜨거운 물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순간, 거무스레 어두운 색이 발그스레 밝은 색으로, 본색이 드러나는 바람에 창피를 당하는 이중인격.

날카로운 발톱은 항상 날을 세워서 공격 준비를 하고, 보말 껍데기 속에 감추고 있는 위장과 엄폐의 전문가. 먹을 것을 찾아서 이 바위 저 바위 이 구멍 저 구멍 헤집고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싱싱한 것 썩은 것, 동물성 식물성, 무료 유료 가리지 않고, 몸에 좋다면, 덥석 덥석, 아그작 아그작 뜯어 먹고 사는 잡식성.

크기는 왜소한 것이 단단한 껍질 속에 숨어서 거들먹거리다가도, 급할 때는 집도 버리고 몸만 쏘옥 빠져나오는 꼴불견. 이상한 소리가 들리면, 바위 밑으로 순식간에 굴러 떨어져 도망가는 순발력, 그러다가, 사방이 조용해지면 살금 살금 기어나오는 조심성. 도망갈 여유없이 아주 급박할 땐, 발과 더듬이를 단단한 껍질 속으로 숨기는 생존본능. 풀잎이 바람에 누일 때는, 햇빛이 닿을락말락 깊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서 오랫동안 나오지 않은 재주꾼. 촉수인 기다란 안테나와 잠망경인 두 눈이 쬐깐 과도로 발달한 추물.

고기 낚는 미끼로 쓰고자, 단단한 껍질을 깨부수고, 낚시 바늘에 힘들여 꿰어봐야, 물속에서 수영이나 하지, 고기 한 마리 제대로 유인할 능력도 없는, 시간만 낭비시키는, 낚시꾼이 갯지렁이만큼도 대우 안 해 주는 무용지물. 그렇다고, 화가 나서 가슴이 벌렁벌렁 뛴다고, 거품을 부각하게 물고, 외치려 해도, 입안에서 맴맴 도는. 거기에다 돌아오는 반향은 철썩 내려치는 파도소리와 배고픈 갈매기 울음소리.

배보다 배꼽이 크다고 커다란 배를 밑으로 늘어뜨리고, 누가 뜯어먹을세라 보말 껍질 속에 깊이깊이 감추고, 다음에는 보다 더 큰집으로 이사 갈 꿈에 취한 몽상가. 고슴도치 같은 가시 달린 갑옷은 없어도, 딱딱한 껍질로 된 방어막. 불가사리 같은 해적에겐 당할지라도, 웬만한 피라미들은 떼거리로 덤벼도 견뎌낼 수 있는 강도.

바닷물이 폭풍처럼 밀려오고, 파도가 천둥처럼 바위를 내리치는 날에는, 짜디짠 바닷물에 온갖 죄악 씻어버리고, 착하게 살겠다는 맹세. 그러나, 바닷물이 저만치 빠져나가는 썰물 때가 되면, 이제는 내 세상, 먹이감 찾아나서는 사냥꾼. 하루에 두 번씩 밀물이 밀려오는 것을 알면서도 잊고 사는 치매환자.

생물자원의 시대에도 쓸모없는 거들레기. 이제, 뉘 집의 애완동물?<고영환 제주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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