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론] 거울아, 거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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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아, 거울아, 네 속에 들어 있는 이 낯선 사람이 누구냐?’ 성장기에는 변화하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삶의 신비를 느낀다. 스스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해 결국은 수선화로 피어나게 되었다는 미소년도 나이 들기 전이라서 그리 되었을 것이다. 청춘이라는 탐스럽고 청아한 기간이 지나면 자신의 외모에 일어나는 변화에 기쁨대신 쓸쓸함을 느끼게 되고 심하면 적응이 어려워 사는 맛을 잃을 지경이 된다. 시들어가는 꽃송이를 보면서 봉오리 앞에서 느끼던 신선한 에너지를 경험할 수는 없다. 불만이라도 있는 듯이 축 처진 입매에 반짝임이 사라진 눈, 마른 오이조각처럼 쪼그라드는 피부와 푸석한 흰 머리카락, 아픈 관절과 민첩하지 못한 기억력, 축복받은 듯 행복한 꿈에 잠기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오히려 사는 일에 짜증이 솟구치기 쉽다. 노쇠하여 영락하는 자신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저지르는 어리석은 일들도 다양하다. 피어나는 소녀의 미모에 질투심이 폭발하여 딸을 제거하려 했던 백설이 엄마는 좀 심하게 꼬인 예라고 여기겠지만, 따지고 보면 이상한 점에서는 요즘 여자들도 그에 못지않다. 또 거들어 주고 부추기는 주변 환경과 함께 앞으로도 기이한 행동은 더욱 증폭될 전망이다.

새 잎 나고 꽃이 피어 무성하였을 때는 온갖 새들이 다 날아와 즐겁게 지저귀며 삶을 예찬하지만 늦가을과 함께 잎 지고 열매 다 떨어지면 나무는 정적에 잠기게 된다고, 여인의 삶을 비유하는 제주 민요도 있다. 빛으로 넘치던 풍요로운 시절이 있으면 어둡고 위축되는 시기가 따른다. 억새가 피어 스러지는 것을 지켜봐도 여인의 일생을 연상하게 된다.

봄풀 우거지며 여름으로 치달을 때 물빛을 머금고 촉촉하게 억새가 피어난다. 점점 붉은 빛을 띠며 억새는 늦여름 햇살에 생기로 번득이다가, 날이 가면서 은빛으로 기운다. 차차 번쩍임을 잃고 푸석해 지다가, 겨울이 깊어지면 억새는 누렇게 말라서 바스락거리는 줄기 위에 흰 구름처럼 풀어진다. 바람을 기다리며 날아갈 채비를 하다가 산에 내린 눈도 얼었다 풀렸다 줄어드는 사이 어디에선가 봄기운이 감돌 무렵이면 억새는 자취를 감춘다.

순수하게 뛰어놀던 푸른 유년기가 지나면 붉은 치마 차려입고 시집을 가고, 차차 젊음과 생기가 시들기 시작하여, 드디어 파파 할머니가 되어 사라지는 여인도 억새와 흡사하지 않은가. 좀더 살면서 피어나는 억새를 다년간 반복해서 볼 수 있다는 차이는 있지만 커다란 주기로 보면 유사한 흐름이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여성의 역할이나 그 삶의 특색을 3단계로 구분지어 놓기도 했다. 꽃과 과일과 씨앗의 단계인데, 처음 성숙할 때는 꽃으로 살고 그 다음은 풍요로운 과일이 되다가 마지막에는 씨앗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결국 여성은 아름답고 신비한 삶을 표상하며 경험과 지혜를 간직하여서 다음 세대에게 삶을 전수하는 존재이다.

사회구조나 상업적 가치에 기초한 광고에 물들어 세뇌되고 중독 된 눈으로 보면 협소한 틀에 자신을 가두게 된다. 도처에 있는 다양한 거울을 통해 비쳐지는 삶들을 보자. 오랜만에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옛 친구의 얼굴, 숱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름다움과 애틋함을 아로새기고 흘러간 작가들, 스타들, 열창되던 노래들, 떨어져 쌓인 묵은 잎 위로 스프링처럼 뛰는 사슴 무리, 물가를 찾아 날개를 접고 내리는 철새들, 암에 걸려 가망성 없는 치료를 받으며 병원에 누워있는 친지, 실직한 누구와 공금에 손 대고 지명수배를 받는 누구, 또 자살한 누구와 이혼한 누구, 화투와 술과 게임 등 등 중독으로 도망쳐서 현실을 팽개쳐버린 이들...한 걸음 물러서서 보면 화려한 겉포장 뒤에 숨어있는 빈약한 내용이 드러난다.

시간의 낫질을 따라 베어지는 풀처럼 무너지는 삶과 새로 돋아나는 싹들, 생명의 주기를 인정하고 작은 씨앗으로 축소되어 원점으로 돌아가는 일을 일찌감치 받아들이는 데 성숙의 열쇠가 있을지도 모른다.

<강방영 제주한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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