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 - 정치와 예술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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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에는 의외의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월드컵 4강 진입과 더불어 소위 ‘붉은악마’의 탄생이 그 첫째이고, 다음은 두 여중생 죽음에 대한 미국의 냉담한 반응과 그에 대한 시민의 촛불 시위이다. 20% 지지도에도 못 미치던 한 후보가 그 지지도를 회복하고 대권을 차지한 일이다. 이러한 의외의 사태 앞에 사람들은 뭔가 우리 사회에 일어나고 있는 그 어떤 변화를 예감하고 있다.

이 이변과 같은 일들은 그동안 우리 의식의 심층에서 숨죽이면서 자라고 있던 갈망이 용솟음쳐 드러난 것이다. 한국 축구에 대한 시민의 열망은 시민의 정서를 한골로 몰고 가서 거리의 응원 물결을 낳게 했다. 촛불 시위도 미국에 대한 속과 겉이 다른 우리의 그 미묘한 입장이 분출된 것이다.

시위라는 그 집단적 행동은 촛불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구체화된 것은 미국에 대한 우리의 미묘한 정서가 형상화된 예술품이다. 미국사람들도 그 촛불 앞에서는 숙연해질 것이다. 대통령 선거만 해도, 사람들은 그 승패에 대해 인물론이나 정책, 선거 전략과 방법, 세대간의 차이를 말하지만 결국은 시민의 의식에 숨어 있던 변화에 대한 한스러운 욕구가 그러한 선택을 하게 했다.

변혁의 계기는 작은 사건으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변화를 요청하는 상황은 점점 고조되면서도,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숨죽여서 때를 기다린다. 그러다가 차면, 마치 작품을 꿈꾸며 준비해온 예술가의 체험과 영감과 비법이 어우러져 작품을 만들어내듯이 역사를 창조해 낸다. 그런데 모든 것이 다 갖추어졌다 하더라도 작가에 따라 걸작품이나 태작(졸렬한 작품)이 나온다. 이처럼 작품은 작가를 뛰어넘지 못하는데, 이러한 일종의 정직성은 예술의 생명이다. 역사도 그 변혁의 상황에서 주체 세력의 수준보다 더 나을 수 없다. 그래서 역사를 주관하는 것은 신이지만, 그것을 실현시키는 것은 인간이라고 한다.

우리 역사도 대변화의 불길을 창조의 용광로로 끌어들여 새 역사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실기(失機)한 적이 있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정치의 주체세력에 있다. 4.19의 혁명을 구태 정치로 되돌려놓은 장본인들은 (군인들이라고 하지만) 정치인들이었고, 기나긴 무력 통치로 고사되었던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계기가 된 6.29를 살리지 못한 것도 민주화를 자처했던 세력들이었다. 이들은 민주주의를 담보로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채우는 데 급급하였기에 한국의 정치는 오늘까지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쇄신의 소리만 높이고 있다. 자기를 정직하게 성찰하는 데는 게으르고, 방법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정치는 잘 만들어낸 예술작품이다. 그것은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동서남북 어데 사는 사람이건, 부자나 좀 덜 가진 사람이건 그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치는 예술 정신과 그 방법을 지향해야 한다. 그것들은 신처럼 정직하고 엄정하다. 대통령이 될 때까지는 전략이나 인기가 필요했고, 혹 거짓말도 필요했지만, 정치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는 과거 두 번에 걸쳐서 민주주의 대부라고 자처하는 인물들이 대권을 잡게 되었을 때 그들이 부르짖던 그 화려한 이념의 구호들을 기억하고 있다. 문민정부도 좋고 국민의 정부도 좋지만, 그 구호가 스쳐간 자리에 남은 것은 허무뿐이었다. 그 허무가 낳은 한이 오늘의 선택을 가능하게 했다. 이 점에서 대통령 당선자는 현란한 이념의 구호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

정치는 삶의 총체적 예술품이다. 예술의 생명은 정직한 순수와 이질적인 것을 아우르는 조화의 평화정신에 있다. 순수함이 없는 조화는 기교에 흐르고, 평화가 없는 이념은 폭력이 된다. 정치는 그 통치권 안에 사는 사람들이 우선 행복하고 평안해야 한다. 그것은 민족 통일보다 더 소중하면서도, 그것에 다가가는 첫걸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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