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금요칼럼]2등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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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의 선생님 한 분은 가끔 이런 말을 하시곤 했다. “선거에는 은메달이 없어.”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경력이 있다고 알려진 선생님이 그 얘기를 할 때마다 아이들은 웃음을 터뜨리곤 했지만 정작 본인의 표정은 늘 어떤 회한에 찬 것이었다.

2등이라고 하면 어쩐지 맥빠지게 들리는 게 사실이지만 2등은 그렇게 만만한 자리가 아니다. 때로는 1등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우선 글 쓰는 일에서도 그렇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백일장이나 현상모집에서 가장 빼어난 자질을 보이는 작품은 2등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재능은 뛰어나지만 완성도가 떨어진다든지, 학생의 작품으로 믿기 어렵다든지 하는 심사평이 뒤따른다. 1등을 차지하는 작품은 내용부터가 학생다우면서 단정하게 완성도를 보인 쪽이기 십상이다. 훗날의 문사들은 1등보다도 ‘아까운’ 2등들 중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기성문인의 등용문인 신춘문예나 각종 신인상도 다르지 않다. 남다른 소재에 남다른 기법을 구사하는 실험적인 작품들은 당선이 되기보다는 ‘최종심에서 탈락’할 가능성이 높다. 역시 2등이다.

학교성적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다. 1등을 하려면 전 과목에 걸쳐 우수한 성적을 내야 되지만 2등은 어딘가 한 부분에 취약점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그런 2등을 1등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다.

월드컵 축구의 역사에도 위대한 2등팀들이 있다. 1954년 스위스 대회의 헝가리와 1974년 서독대회의 네덜란드가 그 팀들이다. 헝가리는 서독에게 우승컵을 넘겨줬지만 4-2-4라는 새로운 포메이션을 정착시켰고 네덜란드도 서독에게 져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토털 사커의 원조로 명성을 얻었다.

육상 장거리 경주를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처음부터 선두를 달리는 주자보다는 2∼3위를 유지하던 이가 막판 스퍼트로 우승을 차지하곤 하지 않던가.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가장 기록이 좋은 선수의 뒤를 ‘발 뒤꿈치를 밟을 듯이’ 쫓아가라고 자기 선수에게 가르치곤 한다. 무서운 2등들이다.

다시 ‘은메달이 없다’는 정치 쪽으로 돌아가보자. 역시 우리는 늘 1등에게 주목할 수밖에 없다. 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람,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 어떤 비전을 제시하고 역량을 발휘할 것인가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대선으로 말하자면 향후 5년은 1등한 이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우리는 2등을 눈여겨보아야만 한다. 2등이 누구이며 그가 낙선 후 어떤 행보를 보이는가는 다음 5년의 흐름을 판단하는 중요한 요소일 수 있다.

1987년의 2등은 김영삼씨였다. 집권은 노태우 대통령이 했지만 정작 그 임기를 지배한 것은 민주화의 열기였다. 92년 대선에서 사실상 한 뿌리인 양김이 1, 2등을 했다는 점은 민주화와 개혁이 계속되리란 예고라고 해도 좋았다. 97년과 2002년에 연거푸 2등을 한 이회창씨의 지지자들은 87년 이후 코너에 몰려있던 보수세력들을 되살려냈다. 물론 2등이란 본인에게는 불만스러운 자리다. 끝내 1등에 오르고 싶은 이들은 2등으로서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해야 하고 그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87년 대선에서 한계를 느낀 김영삼씨는 3당합당이라는 선택으로 1등이 될 수 있었다. 87년에 3등, 92년에 2등을 한 김대중씨와 97년에 1등을 한 김대중씨는 분명히 달랐다. 이른바 ‘뉴DJ’다. 김종필씨와의 제휴도 마다하지 않았다. 2등에 그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다. 이회창씨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97년에 2등할 때나 2002년에 2등할 때나 변함이 없는 그 이회창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2등에게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 2등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지켜보아야 한다. 선거에는 은메달이 없다는 옛 선생님의 말은 절반밖에 맞지 않는다. 권력은 분명히 1등의 것이지만 시대의 흐름까지 그렇지는 않다. 2등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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