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아줌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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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와 아줌마를 가르는 나이의 눈금은 모호하지만, 일단 아줌마라고 불리는 순간부터 여성들은 괄목상대할 만큼 변신한다. 태어나면서부터 견지해오던 ‘여성다움’과 결별하고, ‘삶의 전사(戰士)’로 환골탈태하는 것이다.

세월이란 도저한 강을 역류하려고 살을 빼고 성형하며 애면글면하는 ‘있는 집, 여사님’들의 추한 이야기가 아니다. 삶의 하중에 무릎 꺾지 않고, ‘쇠심줄’처럼 질긴 생명력으로, 세파를 헤쳐 나가는 이 땅의 절반인 아줌마들, 오지랖 넓은 ‘설문대할망’의 후손들인 ‘우리 동네 아주망’들의 이야기다.

‘하우스 밀감’ 수확을 위해 농장에 모인 아줌마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해가 뜨기도 전에 삼삼오오 농장에 도착한 아줌마들에서 더 이상 녹록한 ‘여성의 나약함’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신 추위 때문에 겹겹이 옷을 껴입고, 언 손을 녹이기 위해 한 켠에 모닥불을 피워 옹기종기 둘러앉은 얼굴들에는, 건강한 흙빛 삶의 결의들로 번들거렸다. 그러다 보니 모처럼 일손을 돕기 위해 청일점(靑一點)으로 함께 한 나는, 몸 둘 바를 몰라, 불가 언저리로 밀려나 딴청이나 부릴 수밖에. ‘워밍 업’ 시간도 길지 않았다. 언 몸이 채 풀리기도 전에 저마다 전정가위를 들고 일어나 나무에 매달렸다. 아줌마들의 힘찬 노동이 시작된 것이다.

규칙적으로 연속되는 가위 소리, 그 수만큼 광주리로 떨어지며 쌓이는 노란 밀감들의 알싸한 풍요, 빈 광주리를 빨리 갖고 오라고 채근하는 소리들이, 농장에 고여 있던 추위의 더께를 벗기고, 아침의 커튼을 활짝 열어 젖혔다.

덩달아 밀감이 소복이 담긴 광주리를 나르느라 초보 일꾼인 나는 땀을 비오듯 흘리는데, 어느 새 그녀들 사이에선 구수한 트로트 가락이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원숭이들처럼 능숙하게 나무를 오르내리는 날랜 몸놀림은 그녀들만의 눈부신 묘기로 관중인 나의 시야를 압도했다.

이어서 약방의 감초처럼 ‘아줌마들의 수다’가 시작되었다. 어젯밤 동네 고스톱 판에서 누가 따고 잃었다며 손익계산서 작성이 한창이더니, 금세 시시콜콜한 동네의 대소사가 입방아에 오르면서 동네 사람들이 ‘아줌마들의 법정’으로 줄줄이 불려 나왔다.

아름다운 선행의 주인공들에게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이 따랐지만, 사람답지 못한 사연의 피의자들에게는 육두문자까지 동원하며 악담을 쏟아 놓기 일쑤여서, 옆에서 귀동냥하는 나의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사람의 입은 쇠도 녹인다’는데 만일 나의 흠결이 저들에게 드러날 경우, 감당해야할 그녀들의 뭇매를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왔기 때문이었다.

노래와 수다, 그리고 잇몸을 드러내는 거침없는 웃음 속에 노동의 하루가 저물고, 3만 5천원의 일당을 손에 쥐고 씩씩하게 돌아가는 그녀들의 귀가에 백면서생인 나는 이래저래 저녁놀빛 부끄러움으로, 수고하셨다는 말도 제대로 건네지 못한 채, 옹골찬 그녀들을 배웅할 수밖에 없었다.

<고권일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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