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오키나와 그리고 제주
전쟁, 오키나와 그리고 제주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지난주 주한 미국대사관측에서 마련한 ‘주일미군 프로그램’으로 언론 관계자들과 함께 일본 오키나와 평화공원을 다녀왔습니다. 일행은 이 공원에 도착하자 곧바로 전시장으로 향했습니다.

전시장은 짧은 시간 내에 오키나와 원주민들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영상과 사진자료를 사건 순으로 배열을 했는데 한발 한발 내디딜 때 마다 일행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전쟁의 참혹함을 그대로 드러낸 영상물은 정말 끔찍했습니다. 온 몸에 수백발의 총탄세례를 받고 쓰러진 병사, 나뒹구는 시체에 달라붙은 온갖 벌레, 몰살된 가족 장면 등등. 모두가 우리의 4·3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이 비참한 광경을 카메라에 담은 사람은 아마도 미 종군기자였거나 미군측 관료였을 겁니다. 그들 덕에 생생한 역사를 엿볼 수 있었지만 과연 그들은 당시 어떠한 심정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오키나와는 태평양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였습니다. 1944년과 1945년 사이 일본군과 지역주민 등 20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가운데 1만명 가량은 우리나라에서 끌려온 우리의 조상이었다는 사실은 전시관에서 100미터 가량 떨어진 한국인 위령탑을 찾았을 때 알았습니다. 위령탑은 우리나라가 1975년에 전국 곳곳에서 1만개의 돌을 모아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더군요. 제주의 돌들도 고향을 떠난 ‘억울한 영혼’을 위로하며 어딘가에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우연히 위령탑에 헌화하는 40대 후반의 여성과 10대 후반의 소녀를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모녀지간으로 이곳에 휴가 온 도쿄에 사는 재일동포였습니다. 꽃을 사들고 온 사연을 물었더니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워서...”라는 말로 대신 하더군요. 혹시 하는 마음에 고향을 묻자 40대 여성은 아니나 다를까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부모의 고향은 (옛북제주군) 신엄”이라고 했습니다. 순간 뇌리에 떠나지 않았던 4·3의 아픔을 두 모녀에게서도 느꼈습니다. 원래 고통을 겪어봐야 주변의 고통도 이해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들과 헤어져 위령탑을 돌면서 왠지 콧날이 시큰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져 구석진 곳에 한참을 서있어야만 했습니다.

역사는 이렇게 전쟁과 인간의 잔인함을 기록해 경종을 울리지만 인류는 늘 깜박깜박 잊고 지내고 있습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