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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둘레길 생태환경의 보고
   

길은 목적지를 가기 위한 최단 거리이자 시작과 끝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웰빙 바람과 걷기 열풍이 더해지면서 길에서 휴식과 안정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본지는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제주의 길과 그 이면에 감춰진 역사와 문화, 생태, 경관자원을 재조명하고자 한다.【편집자 주】

1. 숲길 이야기-한라산 둘레길(上)

해발 600~800m 한라산 허리자락을 한 바퀴 도는 한라산 둘레길은 전체 80㎞ 구간 중 현재 4개 코스에 51.8㎞(65%)가 개설됐다.

 

2010년 맨 처음 개장한 동백길(13.5㎞)을 비롯해 돌오름길(5.6㎞), 수악길(16.7㎞), 사려니숲길(16㎞)이 있다. 동백길로 불리는 1코스는 법정사에서 시오름을 거쳐 돈내코 탐방로까지 5시간이 걸리는 장거리 코스다. 여름에는 울창한 원시림이 하늘을 가리고, 겨울에는 푸른 산과 숲이 순백으로 변한 설국(雪國)을 만날 수 있다.

 

동백길의 유래가 된 동백나무숲을 지나 오솔길로 들어서면 잎이 탈 때 ‘꽝꽝’ 소리를 내는 꽝꽝나무를 비롯해 나도히초미·굴거리나무 등 생소한 나무들을 만날 수 있다.

 

인적이 드물고 적막감이 감도는 깊은 산 속에 길을 낸 사연이 있다. 일제는 한라산의 목재와 표고버섯 등 산림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주민들을 동원, 우마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을 닦았다. 1945년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일본군은 미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기 위해 병참로로 이용했다.

 

법정사에서 시오름을 잇는 숲길 중간에 반반한 돌을 깔아 평탄하게 다진 폭 3m의 ‘하치마키 도로’ 흔적이 남아 있다. 하치마키(鉢券)는 일본어로 ‘머리 두른 띠’라는 뜻. 일제는 병참로 모습이 한라산에 머리띠를 빙 두른 것 같다고 해서 이 같은 이름을 붙였다.

 

시오름(해발 757m) 정상을 가기 전에 숯 가마터가 나온다. 여기서 생산된 백탄(굴탄)은 일본군 군수품으로 납품됐고, 품질이 떨어지는 흑탄은 표고버섯을 말리는 연료로 이용됐다.
숯 가마터는 먹고 살기 힘든 민초들이 한라산에 화전을 일구고 끼니를 때워야 했던 삶의 흔적이다. 화전민들은 나무를 베어 숯을 구운 후 장에 내다팔아 연명을 했다.

 

조선이 몰락하는 1894년 갑오개혁을 전후로 해발 400~800m의 국영목장(십소장)은 무주공산이 됐다. 밭뙈기가 없던 백성들은 한라산 자락에 있는 국영목장에서 경쟁적으로 화전을 개간했다.

 

시오름 인근 깊은 산속에는 4·3사건 때 만들어진 경찰초소인 ‘시오름 주둔소’가 있다. 얼핏 보면 돌담과 비슷하지만 4·3사건의 마지막 전개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유적이다. 한라산에 숨은 잔여 무장대를 토벌하기 위해 1950년 경찰이 설치한 주둔소는 1954년 9월 4·3이 종식돼 한라산 금족령이 풀릴 때까지 유지됐다
삼각형 모양의 석성으로 만들어진 시오름 주둔소는 전체 둘레가 75m, 높이 2m, 폭 1m의 이중 돌담으로 축조됐고, 감시대와 총구멍이 나있다. 내부에는 무기 보관소와 주거 시설이 있었지만 그 흔적은 사라진 상태다.

 

둘레길 곳곳에는 표고버섯 단지가 많이 있다. 한라산 표고버섯은 크기가 크고 향이 진해 왕실 진상품으로 바쳐졌다. 한라산 표고버섯은 조선시대 이래 1960년대 후반까지 전국 생산량의 70%를 이상을 차지했던 명품 특산물이었다. 그러나 한라산 국유림 벌채 금지에 따른 원목 확보난과 중국산 표고버섯 수입 등으로 생산량이 감소, 지난해 말 기준 69t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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