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론] 내 탓은 없고 남의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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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7일은 막혔던 남북의 철길이 열렸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고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일회에 그친 것이 아쉬울 뿐이다.

그 때 어느 분이 축사 가운데에서 “외세에 의하여 막힌 길이 이제야 57년 만에 뚫는다”고 축하했다.

2차대전이 끝나고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인 것은 외세 탓이 맞지만 6·25전쟁은 외세 탓만은 아니었을 것이고 철길이 막힌 것도 외세 탓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부산포로 상륙한 지 18일 만에 한양이 함락되고 선조임금은 의주로 몽진했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 군이 압록강을 건넌지 14일 만에 한양이 함락되어 인조임금은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가 삼전도에서 적장에 항복하는 치욕을 당했다. 1950년 6월 25일 인민군이 38선을 넘은지 4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을 거쳐 부산으로 피난했으며, 한 달 만인 7월 25일에는 대구와 부산을 제외한 남한의 해방구에서는 완장을 찬 사람의 주도하에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하여 인민군 치하에 들어갔다.

6·25전쟁이야 인민군이 38선을 넘어온 내전으로 시작 했지만, 외세의 개입이 국제전으로 확산됐다.

이 전쟁으로 우리는 군인 27만 명과 민간인 76만명 합해서 103만 여 명이 사망하거나 실종 되는 인명피해를 입었다.(임영태의 대한민국 50년사).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6·25의 피해가 얼마인지 알려 하지도 않으며, 현충일에 태극기 달 줄도 모른다. 그래도 6월이 오면 잊어지지 않은 일들이 있다.

제주농업학교 운동장에는 굶주려 피골이 상접(皮骨相接)한 고아들이 수용됐고, 시내의 공터에 군용천막에 사는 피난민 촌이 형성됐으며, 행군 중에도 들에 널어둔 썩은 고구마를 훔쳐 먹으며 연명해야 하는 방위군이 있었다.

전쟁이 얼마나 처참했는지는 밤중에 적진에서 포탄이 날아오자 왼쪽 다리가 섬듯 함을 느껴 “다리가 잘려 나갔구나”하고 만져보니 있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포탄파편으로 상반신이 잘려나간 전우의 두 다리가 옆에서 몸부림치더라는 참전수기에서 알 수 있었다.

그 전쟁은 외세 탓 만인가. 그 때 유엔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 것인가. 강정구 교수의 말대로 해방은 됐을 것이로되 대한민국은 없어졌을 것이다. 따라서 이 땅에서는 현충일임도 잊은 채 들로 산으로 해외로 여행갈 수 있는 여유가 있겠으며, 식량이 남아돌아 북한에 보낼 수 있겠으며, 세계 11위의 경제 교역국이 될 수 있었을 것인가?

국가에는 국가공권력이 있어서 법과 정의가 지배하여 질서를 유지 하지만 , 국제사회는 힘의 원리가 지배하고 있어서 나라마다 자위를 위하여 일정한 군사력을 보유한다. 그래서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등이 이지스함을 가졌다. 병이 나지 않아도 병원이 있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전쟁이 없어도 나라에는 군대가 있다.

남한은 쌀이 남아도는데 북한에 굶주리는 인민이 있는 것이 외세나 남의 탓이 아닌 것처럼 세상살이에도 남의 탓이 아닌 것도 있다.

내가 가난한 것이 조상 때문만이 아닐 수도 있으며, 내가 병약한 것이 유전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

세상사 모두를 남의 탓으로 돌리면 원망스럽고 오기가 나지만 毒(독)이 되고, 내 탓으로 돌리면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지혜가 나와 藥(약)이 되는 이치도 되새길 일이다.<고창실 전 제주산업정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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