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찬(白雪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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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호 수필가
   

어둠의 장막을 비집고 함박눈이 소리 없이 내린다. 모처럼 세상의 고요란 고요를 다 모아 빚어 놓은 침묵의 시간. 곤히 잠든 대지 위에 수많은 은하의 편린(片鱗)들이 살포시 내려앉는다. 고즈넉함이 묻어나는 함박눈의 향연을 시샘하던 북풍도 분위기에 젖어 이내 숨을 죽인다. 잠시 넋 놓고 바라보던 시선이 일순 섬광을 느낀다. 촌음(寸陰)에 수십 년을 건너는 추억의 열차가 예닐곱 살 성탄제(聖誕祭)의 밤에 멈춘 것이다.

 

모든 것이 부족하기만 했던 시절. 초라한 소년의 마음은 소박한 소망으로 가득했었다. 며칠 전부터 심부름도 잘하고, 동생들에게도 살갑게 대하여 착한 일을 했으니 산타할아버지께서 분명 선물을 주실 것이라며 꾀죄죄한 양말을 정성스레 머리맡에 걸어 두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잔뜩 기대감에 부풀어 쉬 잠이 오지 않던 성탄제의 밤은 그렇게 눈 속에 파묻히고 있었다. 아침이 되어 그 분(?)이 놓고 간 학용품과 과자봉지를 확인한 우리는 저마다 사탕 한 알씩을 물고 마당 가득 쌓인 눈 위를 뒹굴며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하며 노느라 하루해가 짧을 지경이었다.

 

세월이 흘러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오늘의 우리는 진정으로 예전보다 행복한 지 자문해 본다. 도처에 삶의 팍팍함이 묻어나는 이즈음 차라리 내리는 저 눈송이가 온 누리를 뒤덮으면 좋을 듯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거늘, 무에 그리 부족한 게 많은지 제 몫 채우기에만 급급한 파렴치한,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동방예의지국’이란 말을 무색케 하는 철면피 등등. 순백의 함박눈으로 세상의 온갖 추태를 덮어버릴 수만 있다면야. 하기야 그 무슨 소용 있으랴. 사르르 녹는 눈과 함께 제 본래의 모습을 보란 듯이 드러낼 것을….

 

‘인생은 유한하지만, 욕심은 무한하다.’ 온당하게 이룩한 부와 명예는 타의 귀감이 되기에 소중한 것이지만, 비열하고 부당한 방법으로 이룬 그것은 신기루와 같은 것이어서 결국 빈손으로 돌아갈 것임은 자명하다. 아마도 실패한 자의 주머니는 욕심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섣불리 희망을 버리지는 말자. 아직도 우리 주위엔 타인의 아픔에 눈물겨워하고, 자발적으로 말없이 봉사하는 선량하고 온전한 인격의 소유자가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더구나 올해는 상서로운 기운이 범상치 않은 ‘청양의 해’가 아니던가.

 

얼추 반 백 년을 뛰어 넘은 지금도 나래짓하는 백설의 향연에 은근히 가슴 설레며 막연한 기대감에 휩싸임은 어인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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