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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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에 아주 낡은 구두 한 켤레가 두 아이의 싱싱한 웃음소리를 닮은 신들 곁에 있다.

높은 굽을 가져서 언뜻 세월에 녹슨 자욱 없이 아름다운 아가씨의 발에 선택된 것처럼 보이는 갈색 구두이다. 365일을 이레 해가 지나도록 묵묵히 나와 동행해 준 친절한 벗과 같다.

그런 구두의 갸륵한 우정이 고마워 나는 그가 병이라도 들라치면 병원으로 달려가 진찰하고 약 처방을 해 준다. 또한 나들이하기 전에 으레 구두의 신상을 자상히 살피는 일을 잊지 않는다. 나와 구두가 매무새 곱게 단장하고 함께 나들이할 때에는 소중한 벗과 다정히 걸으며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다.

그렇듯 나에게 즐거움을 준 갈색 구두가 더는 수술을 받을 수 없는 극한에 이르렀다. 신체의 장기가 수명을 다한 것이다. 까딱까딱한 구두 굽을 조심스레 다녔는데, 발 걸음새가 자칫 흐트러지기라도 하면 구두 굽이 아예 떨어져 나갈 형국이다. 뒷굽 못질한 곳을 보여 주며 구두수선 아저씨는, 웬만하면 하나 사 신지 어떻게 이 지경에까지 신고 다닐 수 있었는지 발 걸음새가 예쁜가 보다 하고 덧붙이는데, 딱히 칭찬만은 아니게 들린다. 구두 굽을 어찌 더 손 써볼 수 없다는 구두수선 아저씨가 공연히 원망스런 심사를 어쩌랴.

못 자국이 여기저기 뒤엉켜 박혀있는 그의 대수술 흔적. 그는 오직 나를 위하여 고통을 묵묵히 감내하였다. 그의 숭고함을 분수 넘치게 받으면서 그와 동행한 곳에서 나는 무엇을 생각하였고 어떤 행위를 하였으며, 어떠한 결과를 보였던가.

삶의 목적과 가치를 소멸한 자신을 대신하여 새 구두가 바로 그의 곁에 있다. 알 수 없게 짓눌림을 느낀다. 쓸 양 없다 하여 신발장에 넣어두는 일은 그에게 배반의 행위이다. 이제 그를 위하여 내가 할 최선의 의무가 무엇인지 이정(理情)을 그르치지 않게 차분히 생각해 볼 일이다.

낡았음으로 더욱 곰삭은 기품이 있는 갈색 구두는 새 구두에게 자잘한 것에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때로는 벗의 까탈한 성미 때문에 호됐던 지난날을 흉도 보면서 낡은 갈색 구두와 새 구두가 호형호제할 것이다.

<박경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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