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 증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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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후. 시인 / 소설가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한국군들은 이 작은 땅에 첫 발을 내딛자마자 참혹하고 고통스런 일들을 저질렀다. 수천 명의 양민을 학살하고, 가옥과 무덤과 마을들을 깨끗이 불태웠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만행을 기록한 베트남 꽝응아이(Quang Ngai)성의 ‘한국군 증오비’의 시작 글이다. 꽝응아이 성에서만 현재까지 모두 18건의 양민학살 사건이 확인되었으며, 1700여 명의 양민이 희생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 비문은 계속 이어진다.

“1966년 12월 5일 정확히 새벽 5시, 출라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남한 청룡여단 1개 대대가 출라이 지역으로 행군을 해왔다. 그들은 36명을 쯩빈 폭탄구덩이에 넣고 쏘아 죽였다. 다음 날인 12월 6일, 그들은 계속해서 꺼우안푹 마을로 밀고 들어가 273명의 양민을 모아놓고 각종 무기로 학살했다.”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베트남 전쟁에 파병하였다. 1965년 3월 10일 비둘기부대는 인천항을 통해 파병하여, 3월 16일 사이공에 도착하였고, 지안에 주둔하여 건설 지원임무를 수행하였다. 그 후 주월한국군사령부를 창설하고 채명신 소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다음 청룡부대가 1965년 10월 9일 깜란에, 11월 1일에는 맹호부대가 뀌년에 상륙을 하였다. 한국의 베트남 파병 병력의 누계는 32만 명에 달했다. 파병이 최고조에 달했던 1968년 베트남에 주둔한 한국군의 수는 5만여 명이었다. 베트남 전쟁기간 동안 한국군의 전사자는 약 5000여 명이었고, 1만10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국군은 전쟁 중에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전투원 약 4만1000여 명을 사살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미군은 직접 원주민과 마주치는 마을에 대한 수색작전을 기피하여 마을수색은 주로 한국군에 맡겼다. 한국군은 전과를 올리기 위해 무리한 작전을 수행하고 무차별 사살을 하여 민간인 학살이라는 비극적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베트남정치국 전쟁범죄조사보고서에 의하면 남부 베트남에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자의 숫자를 5000 명으로 추정하고 연구자들은 9000 명 정도로 보고 있다.

베트남전쟁 참전은 한국정부가 먼저 제안하고 미국이 승인하여 이루어졌다. 그 결과 군사독재는 더욱 강화되었고, 사회 전체가 병영 사회화되었다. 전쟁을 정당화 하였으며, 참전 군인은 고엽제로 인해 후손까지 피해를 보았다. 참전한 대가로 돈을 벌고 그 결과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하였다.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만든 것이다.

지금, 베트남에 대하여 진심어린 사과를 하고,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보상을 포함한 포괄적인 협조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중대한 국제법 위반행위다. “과거의 잘못을 단죄하지 않는 것, 그것은 미래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이다”라는 알베르 까뮈의 말이 생각난다. 베트남 곳곳에는 ‘한국군 증오비’가 곳곳에 세워져 있으며, 그것을 읽으며 베트남 청소년들은 한국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고 있다. 베트남 꽝응아이성 ‘한국군 증오비’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모두가 참혹한 모습으로 죽었고 겨우 14명만이 살아남았다. 미제국주의와 남한군대가 저지른 죄악을 우리는 영원토록 뼛속 깊이 새기고 인민들의 마음을 진동토록 할 것이다. 그들은 비단 양민학살뿐만 아니라 온갖 야만적인 수단들을 사용했다. 그들은 불도저를 갖고 들어와 모든 생태계를 말살했고, 모든 집을 깨끗이 불태웠고, 우리 조상들의 묘지까지 갈아엎었다. 건강불굴의 이 땅을 그들은 폭탄과 고엽제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불모지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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