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욱. 배재대 정치언론안보학과 교수
먼저 이념 갈등 그 자체는 결코 부정적인 현상이 아니다. 사회에서의 갈등은 존재하기 마련이고, 어떠한 갈등이던 그것이 표출되지 않고 숨어있는 것보다는 표출되는 것이 건강한 민주사회의 신호이다. 특히 사회의 다양한 갈등 중에서도 이념 갈등은 다른 갈등에 비해서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지역 갈등이나 세대 갈등과 비교해 볼 때 이념 갈등은 타협점을 찾기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영남과 호남이 대립할 때는 중간 타협점을 찾기 쉽지 않다. 반면 보수-진보 간의 갈등에서는 얼마든지 정책적 타협이 가능한데, 그것은 보수와 진보가 기본적으로 연속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념 갈등이 다른 갈등에 비해 바람직한 또 다른 이유는 정책에 대한 입장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권자가 특정한 이념성향을 가진다는 것은 정책에 대한 분명한 입장과 선호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보수적 유권자는 경제성장을 위한 정책을 선호하고 진보적 유권자는 성장보다는 환경 보호를 위한 정책을 중시한다. 따라서 많은 유권자의 이념적 성향이 보수와 진보로 분명히 나눠지고 대립한다는 것은 그만큼 유권자의 정치의식이 발전했음을 의미한다.
이념 갈등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표현이 중도 혹은 중도실용주의다. 그런데 중도란 분명한 이념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분명한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상대방을 관용하고 이해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분명한 원칙이나 입장 없이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중도실용주의는 바람직하지 않다. 진정한 중도 정치세력은 분명한 자기 입장을 가지고 있지만 상대방을 부정하는 독선에서 벗어나 관용과 타협을 실현할 수 있는 세력이다.
만약 한국에서의 이념 갈등이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보수-진보 간 타협이 선진 민주국가에 비해 쉽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념 갈등이나 양극화 그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양자 간 타협이 한국에서 잘 실현되지 않는 이유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이념 갈등이 가지는 특수성은 두 가지다. 하나는 분단국가라는 현실이다. 또 다른 특수성은 이념 갈등이 세대 갈등과 중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관의 차이가 이념 갈등과 중첩되어 기성세대는 보수, 젊은 세대는 진보 성향을 가질 확률이 높다. 이념 갈등이 세대 간에 존재하는 기본 가치관의 차이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만큼 타협이 쉽지 않은 것이다.
서구 민주국가에 비해 한국 유권자가 이념적으로 더욱 분극화되어 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념 양극화를 내세우며 유권자가 분명한 정책적 입장을 가지는 현상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일은 결코 한국 민주정치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념을 없애는 일이 아니고, 서로 다른 이념을 관용하고 타협하는 성숙함이다. 이러한 성숙에 시간이 걸리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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