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전국을 강타한 IMF 한파에 제주 사회 '휘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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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 위기와 제주(1998~1999)
   
제주일보는 IMF 사태로 인해 가족을 잃고 가슴 아파하는 사연, 인생의 방향을 바꾼 도민들의 이야기를 시리즈로 게재했다.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우리나라는 ‘한강의 기적’을 일군 나라에서 IMF의 경제신탁통치를 받아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이에 따라 우리 국민은 한국전쟁 이후 최대 국난이라 일컬어지는 IMF관리체제를 벗어나기 위해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외환 위기 제주 강타=1997년 12월 3일 정부와 IMF 간 최종 협상이 타결되면서 파국은 면했지만 IMF 한파가 곧바로 제주사회를 강타했다.


외환 부족으로 촉발된 경제 위기는 국민들을 자극해 제주 경제의 한 축인 관광 산업을 끝 모를 침체의 터널로 빠뜨렸다.


1998년 한 해 동안 제주를 찾은 관광객은 306만명으로 전년보다 100만명 가량 감소하는 등 해마다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던 관광산업은 1980년대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관광객 감소는 관련 업계에 연쇄 타격을 가해 기반이 탄탄했던 업체들마저 쓰러지기 시작했고 전세버스·렌터카들은 기약 없는 관광객을 기다리며 차고에 방치됐다.


환율이 고공행진을 계속하면서 면세유·비료·사료 값 등이 치솟아 생산비는 크게 늘었지만 소비 심리 위축으로 농·수·축산물 가격은 오히려 내리거나 이전 수준에 그치면서 1차 산업의 기반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건설업으로 대표되는 도내 2차 산업은 고금리를 견디지 못하고 ‘줄부도’를 맞았다.


IMF관리체제로 접어들면서 오르기 시작한 금리는 1997년 말 이미 시중은행의 당좌대출 금리가 최고 38%를 기록하는 등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더욱이 신용거래가 실종되면서 원자재 대금 결제가 현금으로 바뀌고 금융권에서도 어음을 회피해 업체마다 심각한 자금난에 처했다.


결국 한 기업의 부도는 다른 기업의 연쇄 부도를 불러일으키면서 1998년 들어 석 달 사이에 116개 업체가 부도의 회오리에 휩쓸리는 등 그 해에만 319개 업체가 부도처리됐다.


살아남은 업체들도 부도 공포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보내는 가운데 금융권과 대기업에서 시작된 구조조정의 회오리까지 덮치면서 도민들은 실업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도내 금융계에서 1998년 한 해에만 460여 명이 직장을 떠나야 하는 등 부모·형제·이웃이 명단에 이름 석자가 포함되면서 거리로 내몰렸다.


1997년 말 3000명 선이었던 도내 실업자는 기업 부도와 구조조정 등의 여파로 1998년 3월 9000명으로 급증했고, 그 해 말에는 1만1000명 선까지 치솟았다.


신규 고용은 사실상 제로 상태에 가까워 도내 대학 졸업생들은 직장 문턱에도 제대로 가보지 못하고 준비된 실업자 신세로 전락해갔다.


보증 피해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데다 고금리와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는 서민들의 삶을 옥죄었다.


제주사회를 지탱해 온 중산층이 서서히 몰락해 간 반면 일부 부유층은 금리 인상 등으로 오히려 돈방석에 앉아 IMF시대의 단맛을 향유했다.


   
1997년 말 시작된 IMF(국제통화기금) 경제위기는 제주사회를 혼란과 파탄 속으로 빠뜨렸다. 사진은 그해 12월 정부와 IMF가 협상 후 기자회견하는 모습.

▲IMF 사회상=IMF 한파를 겪으면서 가장 심각하게 나타난 문제는 경제난으로 인한 가정의 붕괴현상이었다.


1998년 들어 석 달 사이에 도내에서 이혼한 부부는 361쌍으로 하루 4쌍 꼴이었다.


이는 예년보다 50% 급증한 것으로 경제 파탄이 이혼의 주범으로 꼽혔다.


이혼한 부부가 서로 자녀를 맡지 않겠다고 떠미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보육시설에는 고아 아인 고아들이 생겨났다.


그 해 제주일보에는 빚 독촉에 시달려 목을 매 숨진 주부, 농약을 먹고 세상을 등진 가장 등 생활고를 비관한 이웃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줄을 이었다.


부모의 실직과 얇아진 월급봉투는 자녀들에게도 멍에가 됐다.


급식비가 없어 점심을 굶는 학생이 1998년 3월 1269명에서 7월 말에는 1571명에 이르는 등 갈수록 늘어갔고, 수업료를 내지 못한 중·고생도 3770명에 달했다.


생계형 범죄가 급증하면서 적정 수용인원이 650명인 제주교도소에는 한때 800명 이상 수용돼 초만원을 이뤘다.


변호사 선임료 마련이 어려워 생긴 나홀로 재판, 너무 많은 빚 때문에 등장한 상속 포기, 합의금 마련이 어려워 법정에 선 피의자, 폭주하는 가압류·가처분 신청 등 법조계 주변에도 이전에 보기 힘든 풍속도가 생겨났다.


한편 경제난으로 소비가 위축되자 가격을 내리는 업소가 늘기 시작했다.

음식·목욕·세탁·이용료 등의 인하를 통해 박리다매를 추구하는 이른바 ‘IMF 가격’이 확산됐고, 일부에서는 도민들의 어려움에 동참하는 차원에서 가세해 도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직업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어려울 때일수록 서로 돕는 도민 정신이 발휘됐다.

각계각층에서 벌어진 이웃돕기운동과 무료 급식에 나서는 도민들, 실직자를 찾아가는 사랑의 가위손 등 IMF 한파 속에서도 훈훈한 인정이 피어났다.


도민들은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나라사랑 금모으기 캠페인’에 자녀의 돌반지와 결혼기념 패물까지 털고 나섰는가 하면 제주은행 살리기 동참을 통해 뜨거운 향토애를 보여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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