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도병 발굴·추모사업 국가가 나서야
학도병 발굴·추모사업 국가가 나서야
  • 김문기 기자
  • 승인 2015.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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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의 품에 안겨/ 넓은 바다를 아득히 굽어보며/ 높고 넓은 꿈을 가꾸어 온 남아들/ 그대들은 조국의 부름으로 떨쳐나아가…중략…여기는 그대들과 우리들의 모교/ 의롭게 죽고 영원히 사는 길을 우리는 그대들에게서 배우노라’

제주고등학교 총동창회가 지금으로부터 21년 전인 1994년 모교에 조성한 ‘6.25 전몰(戰歿)濟農학도 추념비 뒷면에 새겨진 추념시다.

비문에는 6·25전쟁 당시 제주고 전신인 제주농업중학교(6년제) 재학 중 학도병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한 37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2년 전, 팔순이 넘은 한 학도병 출신으로부터 해병대 입대 신체검사에서 키가 작아 불합격 판정을 받자 검사관을 설득해 서류에 키 158㎝를 162㎝로 고치고 합격통지서를 받아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학도병 모집에 따른 신체검사에서 M1소총을 세워놓고 소총보다 키가 큰 사람은 합격, 키가 작은 사람은 불합격시켰다고 하는데 불합격 판정을 받은 학생 대부분은 총을 들 수 있다고 항의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학도병은 실전보다 후방에서의 피난민 구호와 전황보도 및 가두선전 등과 같은 선무공작을 맡기기 위해 모집됐지만 전황이 불리해지자 실전에도 투입됐다.

‘훈련과 기합이 얼마나 심했던지 엄동설한에 팬티바람에 완전군장으로 구보를 했고, 매일밤 빳따를 몇 대씩 맞지 않고서는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을 견딜 수가 없어 자결한 사건도 있었다’(제농 80년사).

전장에 투입된 어린 학생들은 현역과 같은 훈련을 받고 전투를 치르며 전쟁의 참상을 경험했다.

군 수송선에 오른 나이어린 학생들은 펜 대신 총을 선택해 조국에 목숨을 바치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졌고 정식 기초훈련도 받지 못한 상황에서 곧바로 전장에 나섰지만 부모와 가족을 지킨다는 일념에 모두가 용감히 싸웠다.

도내에서 학도병에 대한 관심은 제주고에 조성된 ‘전몰학도 추념비’ 이후 한동안 잊혀지다 2013년 10월 중문중학교 총동문회가 모교에서 ‘학도병 6·25참전 기념비’ 제막식을 가지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학도병 명단 89명이 담긴 기념비는 받침부분 1.8m, 비석부문 2.8m 등 총 높이 4.6m로 학교 후문 입구에 세워졌는데 학교 총동문회 차원에서 학도병을 발굴, 전체 명단을 비문에 새기기는 중문중이 처음이다.

6·25전쟁 당시 중문중 전신인 부문중학교(4년제)에서는 전교생 219명 중 1학년 80명을 제외한 2, 3, 4학년 139명이 학도병에 지원, 탈락자를 제외한 89명이 총을 들어 전장에 나섰고 이 가운데 8명이 목숨을 잃었다.

중문중에 이어 지난해 6월에는 서귀포중학교 총동문회가 모교에서 ‘서중인 6·25참전 기념비’ 제막식을 열었다. 기념비에는 교사 4명, 여자 해병 4명, 남자 해병 224명 등 모두 232명의 참전자 이름이 새겨졌다.

대정중학교총동창회가 오는 9월 모교에서 학도병을 기리는 ‘침묵의 뜰’ 공간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침묵의 뜰’에 설치되는 동으로 제작된 4m 높이의 조형물에는 학도병 명단과 추모의 글을 비롯해 당시 훈련 장면 등이 조각된다.

6·25전쟁 당시 대정중에서는 재학생 350여 명 중 275명이 소년병으로 참전해 23명이 전사했다. 5년 전부터 추진해 온 추모 사업이 이제야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사업 추진 기간이 오래 소요된 데에는 관련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아 참전자 명단 확보 및 확인 작업이 힘들었기 때문이라는 후문이다.

비에 이름을 새겨넣는 과정에서 단 1명의 누락자가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명단 확보 및 확인은 사업 주체인 총동창회의 몫이다.

학도병에 대한 연구 및 관련 자료는 여전히 부실한 실정이다. 국가보훈처, 교육부 등 국가기관 자료에도 각 학교별 학도병 명단은 정확한 수치로 잡혀있지 않다.

올해는 6·25전쟁 발발 65주년. 국가 차원에서 학도병 발굴을 통한 체계적인 조사와 연구, 추모사업을 시작해야 할 때다.
<김문기 사회부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