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의 역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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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길주. 수필가
   
호주를 여행한 이들은 그곳 환경을 적잖이 부러워한다. 잘 보존된 자연환경이며, 쓰레기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도시 주변과 질서정연한 삶의 모습들. 그 좋은 환경은 결코 거저 주어진 게 아니다. 환경을 조성하고 가꾸어 나가는 데는 시민의 참여와 협조가 절대적이다.

주차나 쓰레기 처리 같은 공공질서는 주민들의 자유의지에 의한 실천이라지만 위반에 대한 책임은 엄정하게 따진다. 길거리에 담배꽁초를 버리거나 집 앞 갓길에 잡초가 무성하고, 잔디의 크기가 일정 수준을 넘으면 벌금을 내야 한다든지. 이제는 체질화되어 자연스레 이루어진다니 시민사회의 역량이 선진수준에 이른 것이다. 생활 질서나 환경보호를 정부나 지방행정에 미루고 적당히 넘어왔다면 지상낙원으로 불리는 오늘의 환경은 어림도 없을 것이다.

그런가하면 네덜란드의 놀이시설은 창의적인 아이디어의 산물로 유명하다. 천편일률적인 시설이 아니라 각 지역마다 주민들이 자율적으로 아이디어를 모아 희한한 소재와 형태로 시설된다. 그것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삶에 재미가 더해지고, 거기서 노는 아이들은 저절로 창의성도 길러진다. 이 또한 시민사회의 역량이 빚어낸 결과다.

존 로크(John. Loke, 영국 사상가)는 시민사회를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이 사회계약에 의해 구성하는 사회로 정의했다. 개인의 생명?자유?재산을 지키기 위한 시민 결합체로 모든 사회의 기초로 보았다. 정부나 의회도 시민사회로부터 위탁받은 기관일 뿐이다. 국가의 존망이나 선진사회로의 진입도 전적으로 시민사회의 역량에 달려있음이다. 우리나라가 시민사회의 역량을 국력 배양의 차원으로 접근해야 할 이유다.

김병연 교수(서울대)는 시민사회의 역량을 ‘자율과 창의, 청렴과 높은 신뢰’로 정의했다. 하지만 경직된 관료체제가 우리 사회의 모든 조직을 장악하고 온갖 규제를 양산하며 시민사회의 역량을 위축시킨다. 하부의 아이디어가 의사결정에 반영되지 못하고, 상부의 눈치를 살피거나 위에서 내리는 명령을 무조건 따르는 복지부동의 행태를 관행처럼 답습한다. 일련의 국가 재난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고 허둥댔던 이유도 그런 행태 때문이 아닌가.

학교교육도 시민역량을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조사(2007)에 의하면 “교실에서 사회생활에 필요한 질서와 규칙을 배우고 실천한다”는 설문에 프랑스는 63%, 영국은 54.3%인 반면 일본은 20%, 우리나라는 18.4%만이 그렇다고 응답했다. “교실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을 배우고 실천한다”는 항목에서도 프랑스와 영국이 각각 60%, 일본이 28.7%인데 우리는 15.9%에 불과했다. 학교교육에서 배려나 공동체의 질서를 체득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 사회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삶의 모습이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이론과 설명 위주의 윤리나 도덕교육을 문제해결 중심의 토론과 현장체험을 중시하는 방식으로 혁신해야 한다.

가정에서 부모의 과도한 간섭이 아이들의 자율성이나 독립성을 저해한다는 우려의 소리도 높다. 공부나 놀이 등 사사건건 부모에 의지하던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홀로 살아갈 생각을 하면 불안 할 수밖에 없다. 공동체의 질서나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는 아이들이 부모인들 제대로 공경할지도 의문이다.

구소련이나 동유럽 사회주의 경제까지 거슬러가지 않더라도 그리스나 이탈리아, 일본의 경제 침체도 상대적으로 낮은 시민사회의 역량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우리는 더 심각한 수준이다. 시민사회의 역량이 경제 성장은 물론 정치?사회?문화의 선진화와 맞물려 있음이니 예사로 넘겨서는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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