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철용 장군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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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택. 의사/논설위원
지난 8월 16일 제주출신 한철용 장군(예비역 육군소장)의 뒤늦은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한 장군은 ‘제2연평해전’이 일어나기 전 북한도발의 징후를 예보했다고 별 두 개(소장)로 강제전역을 당한 분이다. 지금 우리 제주출신으로 그런 장성이 몇이나 있는가. 그의 저서 ‘진실은 하나’는 제2연평해전의 실체적 진실을 밝힌 회고록이었다. 해전이 일어난 지 13년, 책이 발간된 지 5년 동안 그 진실은 파묻혀 있었다.

정보는 승리를 보장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인데 우리는 그 수단을 활용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미 우리가 보았던 영화 ‘연평해전’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군인들과 그들의 동료, 연인,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휴먼 감동 실화였다. 이 영화를 통해 서해상의 참담한 전투 장면을 실감했던 터라 그의 회고담을 듣고, 또 이 책을 읽고 나자 분통이 터지고 가슴이 미어질 듯 했다.

감청부대장이었던 한 장군은 해전 며칠 전부터 북한군의 이상 동태(결정적인 도발통신감청정보)를 파악하여 상신하였지만 국방부는 이를 묵살하여 예하부대에 전달하지 않았다. 2002년 6월 29일 대한민국과 터키의 월드컵 3·4위전이 열리던 날 오전 북한 경비정의 선제 기습공격으로 사지(死地)에 내몰린 참수리 357호의 31명 승조원들은 피를 흘리며 응전했고, 우리 군(軍)은 북한 경비정에 대한 사격을 중단하라는 기괴한 지시까지 내린다. 30분 남짓 진행된 예상치 못한 전투에서 우리 수병(水兵)은 흔들림 없이 치열한 격전을 벌여 NLL(西海北方限界線)을 사수했지만 6명의 희생과 18명의 부상, 고속정의 침몰은 결코 우연이 아닌 필연의 결과였다고 한 장군은 증언했다.

1999년 6월 15일 제1연평해전의 승전 이후부터 우리 군의 대북 방위태세와 교전수칙이 점점 약해졌다고 한다. 북한은 1953년 종전(終戰) 이후 지금까지 약 1700건의 침투와 1100건의 도발을 감행했다.

북의 도발 목표는 시종일관 대한민국의 통제력을 와해시켜 북한식 사회주의 통일의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강력한 응징을 한 번도 못하고 수동적인 대응으로 일관했다. 북이 우리 국민의 생명을 가지고 놀 지경이 된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제2연평해전은 예견되었지만 우리가 당한 해전이었고, 지난 8월 4일 북한의 ‘DMZ 지뢰 도발사건’과 포격 도발은 북한군 침투 정황을 못 잡고 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지고 있다. 북의 군 장비는 낡고 연료도 없다. 핵은 쓸 수 없는 무기다. 북은 전면전을 벌일 능력이 없다. 결국 천안함 폭침이나 지뢰 도발처럼 등 뒤에서 찌르는 짓밖에 할 수 없다. 우리 군은 즉각 자주포 대응사격으로 강력한 응징을 하였고, 북한의 최후통첩이 있자 박근혜 대통령은 3군사령부에서 지휘관들에게 ‘선(先)조치, 후(後)보고’를 지시하면서 군에 대한 강력한 신뢰를 보냈다.

북한이 이번에 가장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우리가 보여준 관·군·민·정이 일치단결한 대북 대응태세였을 것이다. 이번에야 말로 북한의 버릇을 고칠 절호의 기회라면서 소집 명령을 내려달라는 젊은 청년들의 목소리가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현역으로 군 복무 중인 청년들의 기백도 더욱 대단했다. 전역을 앞둔 일선부대 병사들은 작전 투입을 자원했다. 군 통수권자의 결연한 의지, 군을 향한 국민의 응원, 그리고 장병들의 사기가 북한군의 무릎을 꿇게 했다.

이번 남북 고위급 접촉에서 쉽게 타협하지 않고 원칙있는 협상을 한 것은 평가받을 만하다. 박 대통령과 우리 군의 강력한 대북 대응은 국민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와 성원을 받았다. 실기(失期)하지 않은 이번 대응이 기존 남북관계의 악순환을 끊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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