吾, 白頭여 長白이여 漢拏로 이어지는 날
吾, 白頭여 長白이여 漢拏로 이어지는 날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채바다. 하멜리서치코리아 대표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꼭 한번 오르고 싶은 산 중에 제일로 꼽는다면 백두산으로 생각 한다.

일찍이 우리 선조들은 백두산을 장백산이라고도 했다. 달문으로 흘러 내리는 천지물의 낙하는 고구려 장수의 기상과 같이 장엄 하다. 용이 하늘로 날으는 형상이라 하여 비룡폭이라 하였던가. 이런 백두산을 중국으로 돌아서 올라야 하니 제대로 우리 땅을 밟고 올라 갈수 없을까.

 

필자는 단 두 차례 밖에 오르지 못하였으나 분단의 아픔을 곱 씹어야 했다. 단동에서 밤 열차를 타고 20여 시간 이도백하로 갔다. 백두산으로 향하는 승합택시를 낯선 이방인과 함께 타고 등정길에 올랐다. 꼬불꼬불 돌아 가는 고갯 길은 아리랑 고개를 넘는 기분이다. 정상을 가린 짙은 안개로 천지를 내려다 볼수 없었다. 이곳까지 와서 천지에 손 한번 적시지도 못하고 되돌아 설순 없었다. 안내원의 도움을 받아서 가파른 경사를 따라 내려 갔다. 천지에 온 몸을 맡겨 뛰어 들고 싶었다.

 

그후 다시 백두산을 찾았다.(2000년 11월) 백제 왕인박사 뱃길 탐험 항해(2001년 4월 영암 대불항 출발)의 성공을 기원하는 목적으로 올랐다. 이 등정을 위해서 필자는 한라산 국립공원 관리소의 도움을 받아서 백록담 물을 담고 갔다. 첫 봄에 수확했다는 한라산 설록차도 준비했다 천지물과 합수(合水)하는 헌다제(獻茶祭)를 올리기 위해서다. 그동안 여러 단체에서 팔도 흙을 모아서 통일을 기원하는 합토제(合土祭)는 있었으나 한라산 물과 백두산 물이 만나서 합수하는 헌다제는 최초로 올린다는 이야기를 주변 지인들로 부터 들었다.

 

벌써 15년이 지난 일이다. 백두산을 오르는 길은 무릎 까지 차 오르는 눈으로 예사롭지 않았다. 중국 경비대의 감시망을 피해 천지로 내려가는 일도 통과 의례로 남았다. 이런 거사를 위해서 모든 결정은 천지신명께 맡길 수밖에 없었다. 장군봉을 위시한 비류봉, 백운봉, 청석봉들이 함께 감싸 안아 응원 해 주는듯 하였다. 남미 안데스 산맥 ‘티티카카호’의 수심 보다 더 깊다는 세계 최고의 깊이를 자랑하는 천지에서 합수헌다제는 성공적으로 마칠수 있었다. 꿈 같은 일이다.

 

신명스런 백두산 이야기에 대하여 조선 영조 시대 박종(朴琮)은 그의 ‘백두산유록’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석봉이 늘어선 것은 병풍을 두른 것 같고 높이 솟은 것이 군자와 같은데, 그 복판에 큰 못이 고여 있다. 움푹 꺼져 들어가기를 천길이나 되며 물이 독에 있는 것 같아서 엎드려 보면 무서워서 몸이 떨리고, 검푸르게 깊은 것이 잴 수 없으며 땅 구멍에 통할 것만 같다. 얼음이 수면을 덮었는데 열린 곳은 겨우 4분의 1이며 빛은 푸른 유리와 같고, 석문(石紋)이 영롱하여 사면의 그림자가 비치며 얼음이 엷어서 거울 같다.’고 묘사하고 있다. 중국의 산해경(山海經)에서도 넓은 광야 한가운데 불함(不咸)이라 불려질 정도로 자신 속마음을 감추고 함부로 내 보이지 않는 산이라 했다.

 

삼국유사는 태백산(太伯山)으로 불렸다고 했고 고산자 김정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천상의 호수 용왕담(龍王潭), 용궁지(龍宮池), 신수분(神水盆), 천상수(天上水), 달문지(達門池)는 큰 산 봉우리 마다 눈이 없는 여름에도 마치 눈이 내린 듯 하얗게 흰머리로 보인다 하여 붙여진 백두산이며 장백산으로 이름하여 불리는 민족의 영산’이라 했다.

 

이처럼 아름다운 백두산을 한라산 오르듯이 우리 국토처럼 쉽게 오 갈수 있는 날이 한시라도 앞 당겨으면 하는 바람이다.이 나라 금수강산 터전위에 남북이 하나되어 백두산, 한라산 해와 달이 함께 뜨고 천지와 백록이 마주 손잡고 신명나게 춤추며 자유롭게 왕래 하는 그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려 본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