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받아들이려는 영화(映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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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창. 신학박사/서초교회 목사
   
신학교에서 강의를 듣는 학생 중에 베트남에서 온 여학생이 있었다. 학생의 리포트를 보면 유학생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말 실력이 뛰어났다. 유학 오기 전 베트남에서는 꽤 뛰어난 학생이었을 듯했다.

언젠가 강의 시간에 교수인 내가 학생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가 그렇게 오래된 것이 아닌데, 전쟁에서 한국군이 미군과 함께 그들 반대편에서 싸운 것이 분명한데…지금은 경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국과 우호적 관계를 맺는다 해도 머지않은 장래에 과거의 전쟁에 대한 냉정한 평가 과정을 겪게 되지 않겠는가? 현재 베트남을 이끌어가는 사람들 반대편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듯한데,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라고…” 질문 겸 부탁을 했다.

그러자 학생은 이런 대답을 했다. “현재의 흐름에 비판적인 좌파적인 사람들이 베트남에도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현재의 큰 흐름에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런 그룹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게 긴 세월 동안 엄청난 전쟁을 겪었는데, 고통스러운 전쟁사가 그렇게 간단히 잊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도 한 때는 과거사가 대충 해결된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시간에 과거사 논쟁이 다시 고개를 들곤 해왔다. 구태여 학문적 갈등을 말하지 않더라도 대중문화를 통하여 그런 갈등은 잘 표현되어온 듯하다.

‘월컴 투 동막골’은 좌우 진영논리로부터 관점과 방향을 달리하려는 시도를 한 듯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이데올로기 시대에 희생된 우리 가족과 주변을 돌아보게 하는 듯했다. ‘국제시장’은 모처럼 우파적 변호인 입장에 선 영화인 듯했다. ‘암살’은 잊혀진 좌파 독립군의 후손들에게는 고마운 영화요. 친일의 부담을 떨치지 못하는 우파적인 사람들에게는 부담이 될 만한 영화였다. 어느 영화나 나름대로 어느 만큼의 진영 논리를 안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위로와 카타르시스를, 누군가에게는 분노와 아픔을 느끼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설령 이 편으로 치우치고 혹은 저 편으로 치우친다 해도, 어느 편에나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된다. 사회적 통합까지는 못간다 해도, 상대 진영에 대한 이해나 대화를 추구하는 토론장으로서의 기능 정도는 기대해볼 수 있을 거라는 점에서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일차대전’을 배경으로 한 ‘애수(哀愁)'라는 영화가 있었다. 당대 최고였던 로버트 테일러와 비비안 리가 주인공으로 나온 영화였다. “아름답고 꿈 많은 여인이 어떻게 밤거리의 여인이 되어서 스스로 워털루 브리지에서 몸을 내던지게 되었는지?” 전쟁의 모순이 여인을 어둠 속 저 밑으로 내던지는 순간, 관객들은 버려지는 여인을 자신의 마음속으로 받아들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방식으로 전후의 가련한 우리 주변을 서로 받아들였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 영화가 만들어졌으리라 생각된다.

좌우 진영 논리에 충실한 문화는 서로를 배제하는 문화를 만들 가능성이 크다. 최근까지 우리의 영화들에서는 그런 갈등 요소들이 꽤 많이 나타난 듯하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더 서로를 받아들이는 쪽에서 사회적 토론의 장이 될 만한 영화들을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과거는 다 괜찮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회적 역사적 양심의 토대가 사라져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땅에서 함께 살려는 궁극적 의도를 가지고서 서로를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해보자는 것이다. 이런 마음을 여러 사람들이 말하고 노래하다보면, 누군가 그런 영화를 만들려고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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