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오아시스를 찾아서
내 안의 오아시스를 찾아서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양길주. 수필가
   
가을이 오면 가고 싶은 곳 일색이다. 산도 좋고, 바다도 좋고, 도시면 어떠랴. 하고 싶은 걸 마음에 담아두면 병이 될 수도 있으니 떠날 수밖에.

모든 일상을 서울로 잠시 옮겼다. 연전부터 새로 조성하던 공원이 완공되었다기에 그곳에서 가을맞이를 하기 위해서다.

서울과 신의주를 이어주던 남북 종단의 경의선 철길. 그 공간을 따라 조성한 공원이다. 천지가 개벽한다더니, 별 볼 일 없던 동네가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는 서울의 명소가 되었다. 추억의 기적소리만 떠올리게 하던 삭막한 공간이 꽃이 피고, 새가 찾아드는 낙원으로 변모한 것이다. 동네방네에서 사람들이 모여든다.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줄맞춰 도열해 서 있다. 지나는 구름이 걸릴 듯 하늘 높이 치솟아 주위를 압도한다. 온갖 야생화와 크고 작은 나무들도 습성과 양태에 따라 오밀조밀하게 눕고, 섰다. 빗자루를 거꾸로 세워놓은 듯, 키다리 양버들도 동글동글한 잎파랑이를 흔들며 손님을 맞이한다. 서로 어깨를 겯고 모여선 자작나무들은 벌써 알몸이다. 악귀를 물리친다는 회화나무, 일곱 손가락 칠엽수, 단풍나무, 자목련, 계수나무, 느티나무…, 모두가 위풍당당이다. 몇 해만 더 발을 붙이면 우람한 그늘로 사람들을 품어 안을 기세다.

바닥에는 사사, 애란, 홍대, 수호초, 돌단풍이 귀엽게 자리를 깔았다. 산에 가면 지천으로 깔린 억새도 결 곧은 줄기에 매단 새품 덕에 이곳에선 제법 인기다. 보석처럼 영롱한 방울꽃을 촘촘히 매단 좀작살나무도 길손의 시선을 끈다.

그런가 하면 공원 한가운데로는 물길을 열었다. 작은 호수도 시늉해 놓고, 조약돌무지 비탈도 꾸몄다. 아득한 옛날 먼 산촌의 어느 시내를 옮겨다 놓은 듯하다. 가재도 잡고, 피라미도 쫓던 그 시냇가. 이 도시의 아이들도 그럴 듯한 인공의 실개울에서 물장구치며 아버지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 적 물놀이를 따라한다. 아이들보다 보는 어른이 더 신난다.

아기자기한 공원의 모습처럼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취향도 다양하다. 노래하며 연주하는 이들도 마주하게 되고, 잔디밭 한 모퉁이에서는 아마추어 화가가 그림을 그린다. 자리를 깔고 오수를 즐기는 연인들, 벤치에 앉아 독서삼매경에 빠진 젊은이들. 할머니들은 일거리를 가져다 손을 놀리랴, 수다를 떨랴, 정신이 없다. 저들만의 언어로 도란도란 얘기꽃 피우며 흐르는 물소리는 시가 되고, 동화가 되고, 전설이 되고…. 낙원이 따로 없다.

자연은 치유하며 가꾸어야 할 삶의 터전이다. 비록 어느 곳에서는 뒤덮고, 파헤치고, 허물며 개발이란 미명의 자연 파괴를 자행하지만 또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복원하고, 재생하는 공력을 들여야 하는 것. 제아무리 문명이 좋다한들 인간은 자연의 품속에서 생을 누리다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하는 자연의 자식일 뿐이다.

새벽에 일어나 이곳을 오가며 상상의 꼬투리를 실개울에 띄워 놓고, 저녁이면 조용한 구석 벤치에 앉아 오가는 이들의 면면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에 평온이 깃든다.

공원은 도시의 오아시스다. 만인을 위한 행복의 요람이다. 배고픈 이에게 한 조각의 빵은 생명의 양식이지만 문명에 찌든 도시인에게 공원은 치유의 공간이며 안식처다.

일상에서 접하기 어려운 인연이나 아름다운 그 무엇을 찾아서, 아니면 내 안의 불안이나 나약함을 떨쳐내고 보다 건강한 삶을 살아보려 발품과 시간과 경비를 들이는 게 여행이리라. 이 가을, 저마다 마음에 그리는 오아시스를 찾아 심신의 사기(邪氣)를 털어내고 생기로 채워보는 건 어떨까.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