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2016
응답하라, 201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오대혁. 시인/문화비평가
‘시간은 기어코 흐른다. 모든 것은 기어코 지나가 버리고 기어코 나이 들어간다. 청춘이 아름다운 이유는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 덕선의 마지막 내레이션에서

덕선이와 택이가 결혼했다. 덕선이의 내레이션으로 쌍문동 골목이 사라지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초반을 이끌던 내레이터 정환이는 슬픈 사랑을 안고 온데간데 없었다. 이전의 ‘응답하라’를 이끌던 짝짓기의 긴장감은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의 중심 서사로 다가서지 않았다. ‘응팔’은 멜로를 넘어선 자리에 똬리를 틀었던 것.

‘응팔’은 빅히트였다. 20퍼센트에 달하는 시청률은 ‘쌍팔년도’의 추억을 시청각화한 데서 일차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굴렁쇠 소년과 함께 시작된 긴장감은 수학여행과 러브레터의 추억을 불렀고, 땡땡이를 부르는 자율학습과 집합 부분만 시커멓던 정석수학, ‘애마부인’과 ‘탑건’, 청바지와 박남정의 춤사위, 고독했던 가나초콜릿과 김완선의 ‘리듬 속의 그 춤을’이 금토의 저녁을 수놓았다.

그리고 가끔은 성보라가 연출했던 학생운동의 추억과 민중가요 ‘동지’의 노랫가락도 떠올렸다. 얼마나 아련한 추억인가? 무상(無常)한 인생의 한 시즌이 되살아오는 희열을 수많은 이들이 느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응팔’의 미덕을 국한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응팔’은 그 추억 속에 온전히 똬리를 튼 ‘연대, 소통, 공동체’ 등을 불러왔다. 그것은 현실에 부재(不在)한 삶의 원형이다.

이전 시리즈가 당대 세대들의 사랑과 추억을 불러온 것에 비해 ‘응팔’은 쌍문동 봉황당 골목이라는 공간 설정 속에서 ‘쌍팔년도’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들의 연대와 소통을 잔잔하게 그렸다.

‘응팔’은 꼴찌를 면하지 못하는 ‘도롱뇽’과 ‘덕선’이 학교 우등생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면서 사랑과 우정의 성장 서사를 흥미롭게 그려 보였다. 게다가 이전에는 없었던 이웃공동체의 따스한 장면들이 네 가족을 통해 드러냈다.

골목길 공간 속에서 부모 세대가 겪어야 했던 위기 극복의 과정이나 위안과 배려는 ‘응팔’의 인기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었다. 성적 때문에 비관하는 일이 없으며, 잘난 친구 못난 친구가 없는 세상, 경제적 궁핍이 죄가 아닌 세상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현재 공동체 생활로 위안을 얻고 정체성에 도움을 받는 지수를 뜻하는 공동체 지수가 OECD 34개국 중 한국이 33위이고, 한국의 세계평화지수가 2000년 이래 최악으로 143개국 중 51위라고 한다.

국내 정치평화 수준은 29위에서 51위로 대폭 낮아졌다고 한다. 이웃과의 만남은 물론이고 가족 및 친족 간에도 친밀도가 떨어지는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세월호’ 문제며 메르스 사태, 무능한 정부와 정치인들의 리더십 부재 속에서 한국인들은 신음하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잘 들여다보면 ‘응팔’이 지향하는 서사는 결코 과거에 가 있지 않다. 현재의 부재를 넌지시 보여준다. 공동체의 붕괴를 부추기는 반대 지점에는 획일화된 역사 만들기, 노예적 노동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적 ‘반경제민주화’가 자리하고 있다.

‘응팔’은 종방을 하고서도 계속 2016년의 공동체에다 대고 ‘응답하라’고 무선을 보낸다. 응답하라, 응답하라, 이공일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