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꾼 한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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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동철 제2사회부장대우
단 한 표차로 역사를 바꾼 일이 있었다.

영국 왕 찰스 1세는 의회와 오랫동안 적대 관계에 있었다. 1649년 찰스 1세는 탄핵을 받아 135명으로 구성된 재판관의 심판을 받는다. 이때 67명이 처형에 반대했으나 나머지 68명이 동의한다. 한 표가 왕의 목숨을 앗아갔다.

1875년 프랑스는 단 한 표 차로 왕정 체제에서 공화국으로 바뀌게 됐다. 당시 왕당파와 공화파 국회의원은 똑같이 353명이었다. 왕당파 의원 한 명이 급성 복통으로 투표에 불참, 공화파가 한 표로 이기면서 프랑스는 제3공화국 시대가 열렸다.

1923년 히틀러가 나치당의 총수로 선출된 것도 단 한 표 차이였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1954년 국회는 초대 대통령에 한해 횟수 제한 없이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도록 헌법을 바꾸려고 했다.

개헌안을 투표에 붙인 결과, 재적의원 203명에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가 나왔다. 가결되려면 재적의원의 3분의 2가 찬성한 136표가 필요한 데 1표가 모자라 처음엔 부결됐다.

이 때 나온 이상한 논리는 지금도 회자되는 ‘사사오입(四捨五入)’이다. 4이하는 반내림하고, 5이상은 반올림하다는 것. 재적의원 3분의 2는 ‘135.33명’이어서 반(半)도 안 되는 0.33의 소수점 이하는 삭제하는 것이 옳다며 자유당은 의원 총회에서 이 안을 채택한 후 이들끼리 모여 개헌안을 통과 시켜 버렸다.

‘사사오입 개헌’은 이렇게 탄생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12년간 장기 집권을 하게 된다. 그러나 1960년 3·15부정선거로 4·19혁명이 일어나면서 이승만 정권은 막을 내렸다. 이처럼 역사적인 사건들의 공통점은 ‘단 한 표 차’로 결정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주도민들은 단 한 표가 아닌 4·3으로 초대 국회의원을 뽑지 못하는 아픔을 겪었다.

제1대 국회의원 선거는 1948년 5월 10일 국제연합(UN) 감시 아래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치러졌다. 우리나라 헌정사(憲政史)에서 최초로 구성된 의회여서 ‘제헌국회(制憲國會)’라 불렸다. 그러나 4·3의 영향으로 당시 북제주군 갑(제주읍·조천면·구좌면)과 북제주군 을(애월면·한림면·추자면) 등 2개 선거구의 선거는 무효가 됐다. 누구나 바랐고, 염원했던 초대 국회의원을 우리 손으로 뽑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래서일까. 제주지역 국회의원 선거 투표율은 역대 1~2위를 달려왔다. 제주지역 투표율을 보면 15대 71.1%(2위), 16대 67.2%(1위), 18대 53.5%(1위) 등으로 집계됐다.

20대 국회의원 선거가 5일 앞으로 다가왔다. 나의 한 표는 제주특별자치도는 물론 국가의 중대사를 다룰 국회의원의 당락을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위의 사례처럼 우리 손으로 뽑은 국회의원들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다.

그러나 19대 선거에서 제주지역 투표율은 54.7%로 17개 시·도 중 8위에 머물렀다. 젊은 세대의 참여가 저조해 투표율은 곤두박질 쳤다. 인구 1000만명인 서울(55.5%)보다 뒤진 수치다.

제주新보 등 6개 언론사의 여론조사에서 도내 유권자 10명 중 2명꼴로 지지 후보를 결정하지 못한 부동층으로 나타났다. 투표율 하락이 우려되는 대목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 중 투표권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떠나 공평하게 단 한 표가 주어진다. 그래서 바쁘거나 관심이 없다는 핑계로 투표를 하지 않는 것은 신성한 권리를 져버리는 것이다.

철학자 플라톤은 이렇게 말했다. “정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가장 참혹한 대가는 자신보다 못한 사람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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