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에 있는 명월진성 전경으로 2001년 남문과 성곽, 옹성 등이 복원됐다.

제주시 서부지역의 요충지인 명월(明月·한림 옛 지명)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대결의 장으로 꼽히고 있다.

삼별초의 별장(別將·하급장교) 이문경과 선발부대는 1270년 명월포(옹포리 포구)로 상륙, 고려관군을 무찌르면서 탐라를 점령했다.

이로부터 약 100년 뒤인 1374년 최영 장군은 전함 314척과 정예병 2만5000명을 이끌고 명월포로 상륙했다.

명나라에 말을 바치는 것을 거부해 반란을 일으킨 몽골 출신의 지배세력인 목호(牧胡)를 진압하기 위해서다.

목호 수뇌부는 3000기병과 수많은 보병을 내세워 새별오름에서 결전을 벌였으나 패했다. 이후 탐라는 완전히 고려에 귀속됐다.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도내 해안 요충지 9곳에 군사들이 주둔하던 진(鎭)을 설치했다. 진은 지금의 해군기지의 역할을 수행한 곳이다.

특히, 명월 앞 바다에 있는 비양도에는 왜구가 수시로 출몰,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에 따라 1510년(중종 5) 제주목사 장림은 명월진에 목책성(木柵城)을 설치했다. 1592년(선조 25) 목사 이경록은 이 목책성을 석성(石城)으로 개축했다.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에 있는 명월진성 또는 명월진지로 불리는 석성은 둘레가 3020척(1360m), 높이는 8척(4.2m)이었다.

성 안에는 진사(鎭舍·군대 본부) 3칸, 객사(客舍·숙소) 3칸을 비롯해 사령방(使令房), 군기고(軍器庫) 등이 있었다.

이 성에는 동문, 서문, 남문 등 3곳의 성문과 그 위에는 다락집과 같은 초루(?樓)가 설치됐다.

또 성문 앞에는 각각 옹성(甕城)이 있었다. 옹성은 적이 직접 성문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반원형으로 모양으로 성벽을 두른 것으로, 방비가 견고한 상태를 두고 ‘철옹성’이라 부르고 있다.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1764년(영조 40) 어사 이수봉은 왕에게 건의해 명월진성의 지휘관인 조방장(助防將·종9품)을 무관직인 만호(萬戶·종4품)로 승격시켰다.

이후 명월진성에는 제주 출신 무과 급제자들이 우선 충원됐다.

 

   
▲ 1702년(숙종 28) 이형상 제주목사가 명월진성을 순력한 내용을 그린 모습.

병력은 만호 1명, 치총(稚摠·성문을 지키는 우두머리 장령) 4명, 성정군(城丁軍·성곽 방어부대) 330명, 유직군 99명(留直軍·성 안을 지키는 군졸)을 비롯해 잡무를 맡았던 진리(鎭吏) 22명, 서기(書記) 30명 등 총 486명이 배치됐다.

이 외에 만호가 관장한 봉수대 2곳과 연대 7곳에는 별장(別將) 54명과 봉수군 132명이 배속됐다.

해안에는 판옥선을 보유한 수전소가 있었고 노 젖는 군사 103명이 배치됐다.

1702년(숙종 28) 11월 13일 이형상 제주목사가 명월진성에서 군기를 점검한 그림이 명월조점이다.

명월시사는 이튿날 시험을 통해 활을 쏘는 군사를 뽑는 모습을 묘사했다.

이 목사가 방어 실태를 점검한 순력(巡歷)에서 수비군의 대장은 강세건이었고 그 휘하에 성정군 412명, 말을 기르는 목자(牧子)와 보인(保人)은 185명이었다. 마필은 1064필, 창고에 저장된 곡식은 3300여 섬이라고 기록됐다.

안무어사(安撫御使·지방에 파견된 특사)로 제주에 온 김상헌이 쓴 기행문인 남사록에는 “명월포는 제주 서남쪽 60리에 있는데 1510년 겨울 목사 장림이 본성을 쌓았다. 이는 비양도가 가까워 왜선들이 번갈아 정박하기 때문이다. 성 안에는 우물 하나가 있고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 물맛이 매우 달고 시원하다”라고 썼다.

명월진성은 한림항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성의 돌로 방파제를 쌓으면서 일부가 허물어졌다. 1976년 성을 보호하기 위해 제주도 기념물(지방문화재) 29호로 지정됐다.

옛 북제주군은 2001년 명월진성 남문 성곽을 길이 137m, 높이 4m로 복원했고, 길이 40m의 옹성을 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