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에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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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택진 논설실장
어느 새 5월의 끝자락이다. 올해도 벌써 절반이 흐르고 있다고 생각하니 어느 구석 조급함 같은 게 느껴진다. 홀연 가 버리는 이 ‘계절의 여왕’을 부여잡고 한 번 되뇌이고 싶은 구절이 있다. 수필가 피천득 선생의 ‘오월’의 한 부분이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속에 있다.”

신록의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르는 5월, 그러나 인간사회의 모습은 원한과 분노로 얼룩져 있다. 자고나면 끔찍한 칼부림에 흉칙한 폭행 소식이 빠지지 않고 있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거운 것만이 아닌 세상이다.

▲신문 밥을 먹고 있지만, 뉴스를 보고 듣기가 겁난다. 요즘 들어 신문ㆍ방송에 빈번히 등장하는 낱말 하나가 섬뜩하다. 바로 ‘묻지마’라는 단어다.

얼마 전, 서울 강남역 20대 여성 살인사건이 대표적이다. 30대 남성은 여성이 자신을 괴롭힌다는 피해망상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뚜렷한 동기가 없는 살인, 대상을 가리지도 않거니와 시간과 장소도 불문이다. 단지 이유라면 “여자가 싫어서”, “화가 나서 찔렀다” 정도다.

▲묻지마 범죄는 이렇듯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아무런 상관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범죄 자체에 이유가 없이 불특정을 상대로 저질러지는 이 범죄에 국민적 충격이 가시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사실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다. 최근 3년간 국내에서 발생한 묻지마 범죄는 163건으로 매년 평균 55건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제 누구나가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그래서 불안과 불신의 그림자가 이 사회에 폭넓게 드리워져 있다. 게다가 묻지마의 양상이 갈수록 흉포화되고 있고, 뾰족한 대책은 보이지 않고 있다.

▲묻지마는 비단 범죄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경제 영역에선 ‘묻지마 투자’가 판을 치고 있다. 광풍이라 불리는 제주지역의 부동산 시장이 그렇다. 얼마 전 제주시 아파트 분양시장에서 1순위 청약 경쟁률이 최고 338대 1를 찍었다. 정말로 집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몰렸을까. 그 보다는 시세차익을 노린 투기 세력의 가세에 그 원인이 있다. 일단 당첨되기만 하면 최소 수 천만원의 프리미엄이 조성될 거란 예상에서 너도나도 이유를 묻지 않고 뛰어든 거다.

‘묻지마’의 희생양은 언제나 소시민이다. 범죄에선 여성 등 사회적 약자들이 그 대상이고, 투기 영역에서 집 없는 서민 실수요자들이다. 묻지마의 폐해가 그렇게 서글프다. 해법이 없는 병리일까. 그걸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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