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정고을추사문화예술제에서 김정희가 대정현으로 유배를 오는 과정을 재현한 모습.


1416년(태종 16) 안무사 오식의 건의로 제주섬 서쪽에 대정현, 동쪽에 정의현이 설치됐다.

대정읍성은 대정현이 들어선지 2년 후인 1418년 축성됐다. 초대 대정현감 유신에 의해 1개월 만에 완성됐다.

현감은 지금의 서귀포시 강정에서 한경면 고산에 이르는 제주의 서남부 일대를 다스렸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대정현은 멀고 도적에 대한 방어가 허술해 성을 쌓게 됐는데 장정들이 내 자식의 일처럼 와서 공사에 참여해 한 달도 되기 전에 성을 이뤘다고 밝혔다.

성 둘레는 4890척(1481m), 높이 17척(5.1m)으로 동성리(현 인성·안성리)와 서성리(현 보성리)에 걸쳐 도읍지가 들어섰다. 성내 관아건물은 18동이 있을 만큼 규모가 컸고, 성문은 동·서·남에 설치됐다.

주요 건물을 보면 임금의 위패를 모신 객사인 영안관, 현감의 집무처인 윤경당, 청풍당, 향사당, 군관청, 군기고 등이 있었다.

성 안에는 드레물(擧手井·두레박으로 떠올리는 물)이 있었지만 물이 풍부하지 않아 주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그래서 이 샘물은 탐관오리와 목민관에 빗댄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현감이 탐욕하면 물이 마르고, 청렴하면 물이 솟구칠 정도로 풍부해 진다는 것이다.

이원진의 탐라지(1653년)에 따르면 병력은 파총 1명, 성장 2명, 초관 7명, 군관 72명, 기병 204명, 보병 101명, 수군 375명, 차비군 111명, 속오군 555명 등 1477명에 이르렀다.

1702년 이형상 목사가 점검할 당시에는 성장 2명, 치총 4명, 성정군 204명이 배치됐고, 말 849마리와 흑우 228마리로 돌보던 목자와 보인 123명이 있었다.

창고에는 곡식 1957석을 보유했다. 12개 마을에 민가는 797호, 전답은 149결이 있었다.

그런데 대정현은 중죄인을 벌하기 위한 대표적인 유배지로 꼽혔다. 조선시대 500년간 제주에 유배를 온 260여 명 중 당대의 정치 거물과 대학자는 49명이다.

   
▲ 제주의 서남부지역의 군사·행정·경제 중심지인 대정읍성의 성곽. 서귀포시가 2001년 일부 성곽에 대한 복원을 완료했다

이 중 당파 싸움에 휘말렸거나 왕권을 비판·견제했던 34명(69%)이 대정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동계 정온은 1613년(광해군 5년) 대북파가 영창대군을 역모자로 만들어 강화도에 유배시키는 것을 계속 반대했고, 영창대군이 살해되자 책임자를 처벌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광해군과 권력의 기반이었던 대북파의 미움을 사서 대정현에 10년간 유배됐다.

그는 집 주위에 가시나무인 탱자나무를 둘러서 그 안에 유폐시키는 위리안치(圍籬安置) 형벌을 받았다.

대정현감 김정원은 집 마당에 서재용으로 두 칸의 집을 지어주었다. 정온은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동시대에 유배됐던 송상인, 이익과 어울려 시문을 교류했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대정현에서 유배문화를 꽃피웠다. 안동 김씨 세력의 정치 음모에 휘말린 김정희는 36대의 곤장을 맞고 죽음 직전에 풀려나 유배됐다.

1840년부터 1849년까지 9년간 이어진 유배기간에 김정희는 서예사에 길이 남을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했다. 자신의 신세를 빗댄 그림 ‘세한도(歲寒圖)’도는 국보 180호로 지정됐다.

시·서·화와 경학, 금석학, 불교학의 대가였던 추사는 대정현감의 묵인과 배려로 종종 외출을 했고, 다도(茶道)를 정립한 초의선사 등 많은 벗들과 어울렸다.

1895년 제주목이 제주부(府)가 되자 대정현은 대정군이 됐고, 1914년 대정군은 폐지돼 제주군에 통합됐다.

대정현의 군사·행정·경제의 중심지였던 대정읍성은 4·3사건으로 크게 훼손됐다.

대정읍성은 1971년 제주도기념물 12호로 지정됐다. 성내에는 국가지정사적 487호 추사유배지와 보물 547-1호인 김정희 종가 유물 25점, 제주도민속자료 돌하르방 12기가 있다.

서귀포시는 1986년부터 2001년까지 성곽 703m를 보수하고 치성 3곳을 복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