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어머니에게 부끄러운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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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옥 서울과학종합대 초빙교수/논설위원

서울에 사는 친구가 10년 만에 내려왔다. 아픈 데는 없는지를 묻기도 전에, 친구가 풀어 놓는 삶의 구절들이 여름이 무색하게 서늘하였다.

“어쩌다가 우리 집이 경매로 들어갔어. 어머니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오르더라. 그 집을 살려내려고 미친 듯이 발버둥 쳤어. 이자를 갚는 일에 2년을 바쳤지. 얼마나 힘이 들던지, 어느 날 밤에 이상한 꿈을 꿨어. 얼음으로 된 산을 내가 악착같이 오르는 거야. 히말라야 같은 빙벽이 아니라 유리처럼 반질거리는 매끈한 얼음산이더라고. 오르면 미끄러지고, 또 오르면 미끄러지고. 마치 시지프스가 온 힘을 다해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면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말이야.

너도 알다시피 시지프스는 ‘하늘이 없는 공간, 측량할 길 없는 시간’과 싸우면서 영원히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하는 형벌 속에 있었잖아. 그렇게 버둥거리다 보니, 어느 순간 내가 얼음산 꼭대기에 올라서 있더라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시지프스 신화에 나오는 ‘천천히 흐르는 강물과 별빛이 되비치는 바다와 금수초목을 안아 기르는 산과 날마다 새롭게 웃는 대지’가 한없이 펼쳐져 있는 거야. 갑자기 마음속으로 바다 같은 평안이 밀려들더라. 내가 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겠구나 싶었어. 꿈을 깨고 나서도 얼마나 평안하던지, 드디어 집을 넘길 결단이 서더라.

맨 먼저 어머니를 찾아갔어. 나보다 더 충격을 받으실 어머니가 걱정이었거든. 그런데, 내 얘기를 들으신 어머니가 담담하신거야. ‘살당보민 집을 살 때도 있고 팔 때도 이신 거여. 몸만 건강허민, 살암시믄 다 살아진다’라면서. 우리 어머니는 일을 너무 하셔서 허리가 꼬부라졌잖아. 동이 트기도 전에 밭으로 나가 일하시다가, 물때에 맞춰서 바다로 나가시고, 물질이 끝나면 다시 밭으로 오셨다가, 해가 기울면 집으로 가서 밥을 지어 먹이셨어.

어머니가 그러시는 거야.

‘나는 잠을 자고 꿈을 꾸면서 살아보지 못했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 퍼떡 깨서는 달을 쳐다보며 시간을 짐작하고, 별을 바라보면서 날씨를 가늠했지. 그렇게 평생을 일만 하며 살았지만, 자식들 바라보면 미안하기 짝이 없다. 부지런하면 하늘이 도와주는 법이다. 너무 실망하지 말고 자식 보며 힘을 내라’

친구야, 우리도 어머니만큼만 살아가자. 후회 없이, 부끄럽지 않게!”

친구의 어머니 세대는 지금 80∼90세인 전형적인 제주도 어머니들이다. 일제시대를 지나고, 4·3을 겪으며, 6·25를 보내신 어른들. 나 또한 90이 넘은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아니, ‘모신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움직일 수 있는 한 자식에게 기대지 않는 게 제주도 어머니들의 철칙이 아닌가. 그런 어머니가 지난주에 중환자실로 실려 가셨다. 무더위 속에서 폐렴에 걸리신 거다. 다행히 어머니는 쾌차하셨지만, 병원신세를 지고 나니 눈에 띄게 쇠약하시다.

어머니를 바라보며 토요일마다 방문하는 독거노인들을 생각한다. 무더위에 갇혀서 오직 이 여름이 무사하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 이 분들이 한밤중에 쓰러지면 어떻게 되실까?

제주도에는 1만 명 넘는 노인들이 혼자서 살아간다. 대부분이 관절염, 신경통, 고혈압, 심장병, 당뇨 등을 앓고 있다. 절반가량은 이웃이나 가족을 자주 만나지 못한다. 그 독거의 정도가 우리나라 평균치보다 현저히 높다.

이는 ‘오몽만 해지면(움직일 수 있는 한) 자식에게 기대지 않는 제주도 어머니들의 생활풍습 탓이 크다. 이제는 이 독거관습을 가정과 사회에서 재고할 때다. 지금의 제주도를 온몸으로 지켜낸 분들이 아니신가.

앞으로는 올 여름 같은 폭염이 더욱 더 사나워질 게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모든 것을 주고서도 더 줄 게 없어 안타까운 제주도 어머니들에게, 올 여름은 참으로 부끄러운 계절이다. ‘오몽만 할 수 있다면 물질도 할 수 있다’는 어머니에게, 나 또한 한없이 부끄러운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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