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제주 정치사·제주국제자유도시 개발에 큰 발자취 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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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정일 전 이사장, 소신 있는 판사에서 정치인으로...제주영어교육도시 조성 남다른 애정

3선 국회의원을 역임한 변정일 전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 이사장(74)은 제주 정치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그를 빼놓고 제주의 정치를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현재 진행형인 제주국제자유도시 개발에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4년 동안 JDC 이사장으로 재임하면서 제주영어교육도시 조성 등 국제자유도시 핵심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어려운 형편 속에 키운 법관의 꿈=그는 대정읍 신도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한림중에 입학했고, 선생님들은 그를 돕기 위해 없는 장학제도를 만들기도 했다.


오현고 재학시절 사회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법관의 꿈을 키워,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경제사정은 여전히 어려웠고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야 했다.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졸업할 무렵 독지가들의 도움을 받아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됐다. 1965년 스물셋의 나이에, 대학 졸업 후 1년 반 만에 제5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5번째 도전에서 3등으로 합격했고, 사법대학원에서는 1등으로 수료해 군법무관 3년 복무 후, 1970년 서울형사지방법원 판사로 발령받았다.


형사법원 판사로 근무하며 시국사건을 많이 맡았던 그는 집권세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증거가 없으면 무죄판결을 서슴지 않았다. 한마디로 눈치 안보고 소신껏 판결했다.

 

▲ 변정일 전 이사장 은 군 법무관으로 육군보병학교를 졸업했다

▲판사에서 정치인으로=중학생시절부터 자유당 독재체제에 대한 저항심이 싹텄고 대한민국에 진정한 민주정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자연스럽게 정치로 이어졌다.


하지만 판사생활은 나름 만족스러웠다. 경제적으로 어렵지도 않았고, 사회적 평판도 높았다. 더욱이 국회의원들의 모습을 보면서 법과 양심에 따라 소신껏 판결하는 것도 민주화에 기여한다고 생각하고 법조인으로 평생을 지내기로 했다.


그러나 법과 양심에 따라 소신껏 판결한 것이 원인이 돼 유신헌법에 의한 법관 재임명 과정에서 재임명 부적합 판사로 찍힌 것을 사전에 알게 됐다. 결국 사표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와 변호사를 개업했다. 그때가 1972년 4월, 32살 때이다.


젊은 변호사로 고향에서 자리를 잡은 그는 자기발전의 길을 찾았다. 때마침 정치에 들어설 기회가 생겼다. 주변에서의 권유도 많았다. 그는 진정한 의회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정치인이 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제주 태어나 자랐고 교육받은 제주인만이 제주도민을 대변하는 정치인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오로지 제주도민의 지지에 의한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다짐하며 10대 국회의원선거에 무소속으로 첫 출사표를 던졌다.

 

▲ 14대 국회의원 당시 국정감사에서 질의하고 있는 변정일 전 이사장

▲국회의원 10년과 4·3특별법=그가 국회에 입성한 1979년 4월 이후 1980년 8월 계엄령으로 국회가 해산될 때까지 1년 6개월은 그야말로 격변기였다.


1979년 10월 16일 부마민주항쟁,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세력의 군사반란사건,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항쟁 등 굴곡진 사건들이 이어졌다.


무소속으로 당선돼 공화당에 입당했던 그는 1979년 말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혼란기에 접어들면서 오유방, 홍성우, 정동성, 이태섭, 박찬종, 유경희, 윤국노, 정동성 등 젊은 소장파 의원들과 함께 당의 변화와 쇄신을 촉구하는 정풍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1963년 소위 민정이양 후 한국 정치를 이끌어 온 민주공화당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어떤 형태로든지 대한민국과 역사에 대해 책임을 지고 과거에 대한 반성으로 스스로 자진 해산하든지 새로운 모습으로 환골탈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그게 젊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고, 평소 가까이 지냈던 젊은 의원들과 함께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제11대와 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마했지만 14대·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1992년 5월부터 2000년 5월까지 의정활동을 펼친다.


10년 국회 활동에서 가장 큰 보람은 오랜 숙원이었던 제주4·3의 진상규명과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를 회복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국회의원에 출마하며 그가 도민들에게 약속한 첫 공약이 제주4·3의 해결이었다. 첫 국회의원은 1년 6개월만에 끝났고, 14대 국회에서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15대 국회 후반기였던 1999년 제주4·3 특별법 제정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4·3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기초해 당시 제주중소기업지원센터에서 재향군인회, 경우회, 4·3유족회, 4·3연구소 등 보수와 진보단체를 한자리에 불러 모아 간담회를 가졌다.

 

보수와 진보 양측의 합의로 법안을 만들어 국회에 발의해 1999년 12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했다.


그는 “보수와 진보진영이 함께 논의했고, 의견이 일치했다”면서 “진상규명의 토대 위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도민들의 원혼을 풀어주고 유족들이 입은 상처를 쓰다듬어주려고 했다. 요즘은 너무 이념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다”는 소회를 전했다.


그는 국회 우루과이라운드 대책특별위원회에 참여해 제주농가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고, 국회국제경기지원특위위원으로 2002 월드컵유치에 일익을 담당했다. 특히 제주월드컵유치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제주 유치를 성사시켰다.


그는 “축구협회장이었던 정몽준 의원에게 한국에 제주도와 같이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곳도 있다는 사실을 세계에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설득했다”며 “제주 유치를 결정해 준 정몽준 의원의 도움과 경기장 공사비를 절반 부담하겠다고 나선 신구범 전 지사의 결단이 결정적 동력이 되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 변정일 전 이사장 (사진 오른쪽)이 제주영어교육도시 조성사업 착공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제주국제자유도시 조성=그는 2009년 5월 JDC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JDC가 출범한 지 7년이 지난 시점이었지만 국제자유도시 핵심 사업들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취임과 함께 그가 역점을 둔 부분은 예래휴양형 주거단지 투자를 결정한 버자야그룹의 투자를 확실히 이어가고 신화역사공원과 헬스케어타운의 투자를 유치하는 일이었다.


특히 그가 신경을 쓴 분야는 제주영어교육도시였다. 다른 사업과 달리 영어교육도시는 막대한 투자에 비해 수익은 없는 프로젝트여서 투자자가 나서지 않았다. 결국 그는 JDC의 직접 투자를 결심했고 이뤄냈다.


영어교육도시가 성공하려면 학교가 좋아야 하고, 좋은 시설을 만들어야 하는 게 관건이었다. 그래서 JDC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 좋은 학교를 유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첫 접촉은 영국의 명문 ‘NLCS(North London Collegiate School)’였다. 그는 NLCS에 두 가지를 약속했다. 하나는 NLCS가 가진 교육철학과 본모습을 제주에서 그대로 살리기 위해 어떠한 간섭도 철저히 배제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하나는 학교를 짓는데 NLCS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한다는 것이었다. 좋은 환경 속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학교를 설계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부임 10개월 만인 2010년 3월 NLCS와 학교 설립 계약을 체결했고, 2011년 9월 NLCS 제주가 개교하게 된다.


같은 방법으로 캐나다의 블랭섬홀 아시아를 2012년 10월에 개교했고, 2012년에 11월에는 미국의 세인트 존스베리 아카데미와 본계약을 체결했다. 현재 학교 공사가 진행 중인 세인트 존스베리 아카데미 제주는 내년 9월 개교한다.


또한 중국 녹지그룹의 헬스케어타운 사업과 람정그룹의 신화역사공원 사업 등 대규모 투자 유치를 성사시키기도 했다.

 

▲제주국제자유도시, 현재는 보통=그는 제주국제자유도시 주요 프로젝트에 대해 “현재의 진행은 매우 완만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전체적으로 열기가 고조됐을 때 진전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냉각돼 버렸다”면서 “좀 더 과감하게 진척이 이뤄져야 한다. 선도 프로젝트는 투자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제주 발전과 대한민국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서 결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예래휴양형 주거단지 문제에 대해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중요한 것은 JDC의 역할”이라며 “JDC가 버자야의 속마음을 타진하고, 어느 선에서 사업을 계속할 것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지금 안 되면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고 주민들에게도, 제주도 전체에도 좋을 게 없다”고 진단했다.


JDC의 제주도 이관 논란에 대해 “한마디로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그는 “JDC는 정부 산하 공기업으로, JDC의 사업은 국책사업이 된다”며 제주도를 국제화하기 위한 독립기관의 전문성과 연속성, 국가와 국회 차원의 지원, 높은 신뢰도 등을 이유로 제주도 이전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제주 발전 기회 놓치지 말아야=그는 제주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고 지금 이 순간의 성과에 만족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주문했다.


그는 “인구가 늘어나면 늘수록 제주 토박이 비율은 점점 줄어든다. 그러면 제주도민이 주인이 되는 제주도, 그때의 제주도민은 누구겠는가”라며 “변화에 순응하고 제주 발전을 이끌면서도 제주의 전통적 가치와 환경, 선조들의 문화유산을 철저하게 보호해야 한다. 제주다운 특색이 남아 있다면 30년, 40년 후에 제주도 토박이가 반이라고 해도 결국은 제주도민이 주인이 되는 제주도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여러 가지를 정리하려고 한다. 우선 지내 온 세월을 되돌아보고, 스스로를 평가해 보고 싶다. 적어도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세력들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맞서고, 그런 일에는 나설 용의도 있다”면서도 “정치를 한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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