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TV생산 현장 경험 양분 삼아 구성원들과 함께 멀리 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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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LG그룹의 평사원에서 계열사 최고 경영자 자리까지 오른 허영호 前 LG이노텍 대표. 그는 한국 TV와 전자부품 산업을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우리나라 재계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제조업은 현장에 답이 있다”는 철학으로 서울대 출신임에도 연구소가 아닌 TV제조공장에서 경험을 쌓은 허 대표는 승승장구, 나이 50인 2002년 LG그룹 계열사인 LG이노텍 대표로 발탁됐다.


당시 LG이노텍은 만성적자에 직원들은 패배주의에 빠져있던 LG이노텍의 선장 허영호는 직원들과 공유된 목표로 함께 호흡하며 연 매출액을 15배로 늘리는 등 글로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 허 전 대표 (사진 왼쪽 첫 번째)는 학창시절 공부 잘하면서 운동도 잘하는 오늘날 소위 '엄친아' 였다.

▲ “너는 잘 될거야”
1952년 임진년 용띠해 정월 초하루에 태어난 허영호.


조상을 모시기 위한 제사상이 차려진 상태에서 태어난 탓에 사주가 세다는 말을 들었던 허용호는 역으로 “너는 잘 될거야! 너는 인덕(人德)을 많이 타고 났다”라는 말을 들어며 자라왔다.


제주의 아픈 역사인 4·3 희생자 가족이라는 환경에서 4남 3년 중 셋째로 태어난 허영호는 어릴적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했다.


집에서 4㎞ 떨어진 조천면 신촌리의 신촌초등학교와 조천중학교를 걸어서 다녔는데 비가 내리면 비에 흠뻑 젖은 상태에서 체온으로 옷을 말리며 수업에 임했었다.


먹고 살기가 어려웠던 시절, 어린 허영호의 꿈은 은행원이던 친족의 영향으로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해 은행원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길거리에 붙은 별을 달고 있는 군복차림의 장교 모습의 광고지의 모습을 보고 인문계 고교인 오현고로 진로를 바꾸게 되고 차석으로 입학했다.


오현고 시절 허영호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소위 ‘엄친아’였다.


체육교사는 서울의 명문 사립대학 체육학과로 진로를 권장할 정도로 운동에도 탁월한 소질을 발휘했다.


공군사관학교에 진학할 목적으로 오현고에 입학했으나 서울대학교에 진학하게 됐다.


당시 제주에서 한 해에 3~4명 정도가 서울대에 입학할 정도였으니, 어린 시절 ‘너는 잘 될거야’라는 주문이 행운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고교 시절 허영호에는 한 가지 트라우마가 있었다.


학생회장 후보에 나섰으나 제대로 자신의 뜻도 밝히지 못한 채 우물쭈물 거렸고, 그 결과는 낙선이었다.


머릿속에서는 유창하게 연설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원고 준비도 없이 도전했다가 참패를 당한 것이었다.


이 후 여러 사람 앞에서 나서기를 싫어했고, 대중들 앞에서 연설하는 것에 대한 기피증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경영자로서 여러 사람 앞에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심 끝에 찾아낸 답이 메모하고 사전에 준비하는 습관이다.


대강의 줄거리를 메모 형식으로 사전에 준비하는 습관이 몸에 베이면서 10여 년간의 메모들이 지금도 잘 보전돼 있다.

▲ 허 전 대표(원쪽서 두번째)는 공군사관학교 진학을 위해 오현고에 입학했으나 서울대에 진학했다. 사진은 ROTC복무 기간 중 모습.

▲LG와의 인연…현장에 답이 있다
서울대 전자공학도 허영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1970년대 TV인기 드라마 ‘여로’ 였다.


방학 때 고향을 찾은 젊은 허영호는 낯선 장면을 목격했다.


5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에서 TV는 귀한 것이었고 저녁만 되면 마을사람들이 12인치 정도의 흑백TV가 있는 집 마당에 모여 드라마 여로를 보면서 지친 하루의 일상을 달래는 모습을 보았다.


이 장면을 보면서 “앞으로 각 가정에 TV를 한 대씩 보급할 수 있는 일에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다짐했다.


이 것이 계기가 돼 허영호는 학교와 군 복무(ROTC)를 마치고 1977년 LG전자 TV생산기술과에 입사해 경북 구미의 TV생산공장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엔지니어가 귀했던 시절, 최고 명문인 서울대를 졸합한 그는 원하는 부서에 어디든 갈 수 있었지만 현장을 선택했다.


“내가 입사한 1970년대 중반에도 서울이나 경인지역 선호도가 높았다. 하지만 나는 여로와의 인연으로 뜻한 바가 있어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하기 힘든 공장을 선택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봐도 현명한 선택이었다. 제품이 개발되고 생산되는 현장을 직접 접하면서 몸으로  보고 배울 수 있다는 것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생생한 배움의 터전이었다”


1981년 3월 LG그룹 인재양성의 요람인 LG전자 동경사무소에서 6년 간 근무하면서 전자산업의 강국인 일본을 직접 체험하면서 견문을 넓혔다.


이후 1986년 12월 LG전자 TV설계실, 1992년 2월 LG전자 TV공장장, 1996년 LG전자 DVD사업담당 등 LG전자 TV생산기술과에 입사 후 LG전자를 나올 때까지 20년 가까이 TV생산현장에 항상 허영호가 있었다.

▲ 현장 경영을 중요시 하는 허 전 대표 (사진 앞줄 윈쪽서 두번째)의 철학은 TV생산현장의 그를 대기업 최고경영자 자리에까지 올려놓았다.

▲위기를 기회로…구원투수 허영호
LG전자의 TV와 DVD사업담당 전무를 지냈던 허영호 대표는 2000년 2월 LG마이크론 대표이사로 자리를 옮긴다.


말이 대표이사지만 달갑지 않은 인사였다.


컬러 브라운관용 핵심부품 공급업체인 LG마이크론은 1997년 IMF 금융위기에도 승승하구하던 회사였는데 국내 대기업의 회사채를 대규모로 매입했다가 IMF 사태로 이 업체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심각한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었다.


경영난에 봉착한 회사에 구원투수로 긴급 투입된 것이었다.


그러나 허 대표는 기본으로 돌아가 변화 속에서 기회를 포착하는 혁신적 활동에 돌입했다.


품질에서는 일본을, 원가경쟁력에서는 중국을 이긴다는 목표로, 전사 차원의 대대적인 품질혁신활동과 생산성 배가 운동을 전개했다.


재임 1년만에 심각한 경영난에 봉착했던 LG마이크론은 흑자구조로 전환되고 미래성장동력을 확보하는 과정을 병행하면서 마침내 코스닥 상장이라는 성과까지 이뤄냈다.


이제 한 숨 돌리나 했던 허 대표에게 또 다른 구원투수 업무가 주어졌다.


2002년 또 다른 계열사이인 LG이노텍 부품사업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최고경영자에서 본부장으로 부임하게 됐지만 불평없이 받아 들였다.


“나를 필요로 하니까 나를 보냈겠지”


당시 LG이노텍의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한 상태였다. 오랜 기간 동안 만성적자로 구성원들은 패배주의에 빠져 있었다.


허 대표는 직원들 한사람씩 붙들고 물었다. “우리가 이렇게 헤매는 이유가 어디 있느냐?”


세가지 이유가 도출됐다. 첫째 사장이 자주 바뀌고 둘째, 투자를 안 해주고 셋째, 사내·외 교육기회가 없다는 것이었다.


허 대표는 ‘사장이 자주 바뀌어도 잘되는 회사·투자를 많이 하는 회사·교육을 많이 하는 회사’를 만들겠노라고 선포했다.


직원들과 공유된 목표의식와 신뢰를 바탕으로 경영혁신 과정을 거친 끝에 존폐 위기에 처해 있던 LG이노텍은 매출이 3000억원대에서 허 대표가 재직한 10년 사이 15배로 성장하며 매출액 4조5000억원대의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섰다.


“나는 개인적으로 혁신활동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새마을 운동을 떠올린다. 전 국민을 하나로 똘똘 뭉치게 한 새마을 운동. 경영을 하면서도 이처럼 구성원들이 ‘그 무엇’을 구심점으로 결집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는데, 그 것은 바로 ‘공유된 목표’였다.”


▲벼락 맞고 살아난 사나이
2006년 뜻밖의 사고로 시련도 겪었다.


경기도 지역에서 낙뢰사고를 당했다. 병원으로 이송된 직후 하반신이 마비되기도 했으나 다행히 입원 일주일 만에 상황은 호전됐다.


사고 일주일 후 그룹회장단 회의 일정이 잡혔다. 회사의 중장기 전략보고회의였는데 사고소식이 전해지자 보고를 늦춰도 좋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허 대표는 병원측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회의에 참석했는데 그룹 회장의 한마디 질문, “하느님은 잘 계십디까?”


이에 허 대표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으니 좀 더 일하다 오라고 하시더군요”라고 답했다.


현문현답(賢問賢答)이었으며, 허 대표의 업무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는 한 대목이다.


▲고향 인재 육성 한몫
평사원에서 LG그룹 계열사 최고경영자의 자리까지, 샐러리맨의 성공신화를 구현한 허 대표는 자신의 처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다 보니 고향 ‘제주도’에 대해서는 항상 미안한 마음이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고향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이 무엇이 있나 고민한 끝에 생각해 낸 것이 모교 장학사업과 지역 인재 육성이었다.


허 대표는 올해로 만 10년째 모교에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또한 제주대학교 출신 졸업생 채용에 적극 나섰다. 2004년부터 2010년까지 모두 24명을 채용했으며 지금도 20여 명이 현직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지난달 초에는 차장급 관리자들과 저녁 모임도 가졌다.


만 60세 정년퇴임한 허 前 대표는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처럼 나는 경험을 통해 최고경영자 혼자의 힘으로 조직을 강하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조직 구성원들과 함께 가는 길을 택했다”라고 소회했다.


조문욱 기자
mwcho@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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