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제주시 승격 50주년을 기념해 재현한 조선시대 제주목사 도임 행차에서 제주판관이 목사 뒤를 따르고 있는 모습.

 

제주판관(濟州判官)은 행정과 군사에서 실무를 책임졌던 제주의 2인자 였다.

 

판관이 파견된 것은 제주의 행정단위가 제주목으로 개편된 1295년(고려 충렬왕)부터 시작됐다.

 

이후 정규직으로 부임하면서 조선시대(1392~1906년 기준)에 252명이 제주판관을 역임했다. 평균 재임 기간은 1년 9개월이었다.

 

관직 순으로 보면 제주목사(정3품), 제주판관(종5품), 대정·정의현감(종6품)으로 고을의 수령인 현감보다 직급이 높았다.

 

1702년(숙종 28) 이형상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가 관내를 순시한 탐라순력도에서 제주판관 이태현은 목사를 보필하며 대정·정의현의 군기를 점검했다.

 

이 판관은 순력 당시 지방관(地方官) 겸 중군(中軍·부사령관) 자격으로 목사를 보좌했다.

 

공사가 다망한 목사를 대신해 판관은 행정과 군사에서 상당 부분을 담당했다.

 

그래서 제주성안에 판관이 거처하며 정사(政事) 살피던 관아인 이아(貳衙·二衙)가 설치됐다. 목사가 근무하는 관아를 상아(上衙)라고 불렀고, 이를 구분한 이아는 목관아에 버금가는 관아라는 뜻이다.

 

   
▲ 1702년 이형상 제주목사의 탐라순력도에 나온 찰미헌 관아 모습.

이아 동헌의 공식명은 ‘눈썹 밑의 백성들을 살핀다’는 의미로 찰미헌(察眉軒)이라 명명됐다.

 

판관이 머물던 찰미헌은 지금의 관덕정처럼 우람했고, 외대문과 내대문이 설치되는 등 격식을 갖추고 있었다.

 

찰미헌은 누가 창건했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1810년 손응호 판관이 보수했고, 1897년 김희주 제주군수가 다시 고쳐지었다.

 

판관 중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이도 여럿이 있었다.

 

고려 말인 1234년 판관으로 부임한 김구(金坵)는 재산권 다툼을 막고 힘없는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경계용 밭담을 본격적으로 쌓도록 하면서 밭담이 도 전역으로 확산됐다.

 

옛 문헌에는 “김구는 판관으로 와서 백성들의 고통을 듣고 돌을 모아 밭에 담을 두르게 하니 경계가 분명해져 백성들이 편안하게 됐다”고 기록했다.

 

큰 뱀에게 처녀를 제물로 바쳐야 했던 김녕사굴(金寧蛇窟) 전설에서 뱀을 죽여 수호신으로 추앙받은 주인공은 서련 판관이다.

 

서련은 실존 인물로 무과에 장원급제를 했고, 1513년 2월에 제주판관으로 부임한 후 2년 만인 1515년 4월 제주에서 숨을 거뒀다.

 

전설에서 그는 구렁이가 처녀를 삼키려고 할 때 창과 칼로 뱀의 허리를 자르고 불에 태워 죽인 인물로 소개됐다.

 

이 전설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제주인들이 그의 용맹을 존경하며 받들었거나 이에 반해 토착신앙(뱀신)을 억압한 인물로 재해석하고 있다.

 

제주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한 송두옥은 1892년 제주판관에 부임했고, 이어 대정군수를 역임했다.

 

1893년 가을 기근으로 주민들이 굶주림에 허덕이자 이듬해 봄 재산을 털어 쌀 100석을 내놓았다.

 

제주 출신인 채구석은 진사시에 합격, 1983년 제주판관에 제수됐다. 이듬해 흉년이 들자 봉급을 털어 굶주린 백성을 돌보았다. 1895년에는 대정군수를 역임했다.

 

채 판사는 1901년 이재수의 난이 일어나자 민란군과 천주교도 사이의 유혈 충돌을 막기 위해 노력했으나, 프랑스의 압력으로 파면되고 3년간 옥살이를 했다.

 

이후 중문에서 살았고 1908년 천제연폭포의 물길을 성천봉 아래로 끌어들이는 관개수로를 개척해 5만평의 논을 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