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낚시집 양하르방 철부지 손자, 남북 화해 물꼬 튼 통일꾼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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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식 전 통일부 차관, 이산가족 첫 상봉 산파 역할...제주, 아시아의 제네바 기대
▲ 남복 분단 사상 처음으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교환 방문을 성사시키는 데 일조한 양영식 전 통일부 차관을 퇴임 이후에도 민주편통 상임위원 및 기획특별위원장 등을 지내며 통일꾼으로 한길을 걷고 있다.

양영식 전 통일부 차관(75)은 30년간 통일부에서 공직 생활을 해온 통일꾼이다. 1985년에는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이라는 역사적인 첫 상봉의 산파 역할을 했다.

 

그 후 15년이 지난 2000년에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의 남북정상회담에서 준비기획단장 겸 준비접촉 수석대표를 맡으며 성공적인 회담을 이끌어내는데 일조했다.

 

공직을 퇴임한 이후에도 민주평통 기획특별위원장,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비상임자문위원, 통일선교아카데미 원장 등으로 활동하며 통일 운동에 헌신해오고 있다.

 

▲ 어머니와 피난민 흐느낌 들으며 통일에 관심 갖다

 

양영식 전 차관은 일제 말기이던 1941년 6월 제주시 건입동에서 태어났다.

 

제주시 탑동과 산지천, 관덕정이 어릴적 노닐던 주무대였다.‘낚시집 양하르방 손자’로 불리던 시절 철부지 개구쟁이였다.

 

하지만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발발한 초등학생 시절 북한 출신의 피난민을 목격하면서 분단의 아픔을 배웠다.

 

1951년 1·4 후퇴가 일어나던 해 피난민들이 모여 제주영락교회 창립을 위한 첫 예배를 집에서 보게 됐다. 예배 장소는 기독교를 믿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그의 집이 선택됐다.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니면서 종종 새벽기도나 철야 기도집회 때 눈물겨운 목소리를 듣곤했다. “해방을 주신 하나님! 어서 통일도 주시옵소서! 북녘의 고향 땅으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잃은 부모형제자매들 다시 만나게 하업소서!” 이 통곡의 외침을 들으면서 어린 그도 덩달아 함께 흐느껴 울었다.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소리를 들으면서 추상적이나마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고 통일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는 운명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키 작은 천진난만한 순둥이였지만 제주 바닷가의 먹돌을 뜻하는 ‘섬돌’과 ‘돌킹이(부채게)’ 정신으로 평생 통일 문제에 끈질지게 매달린 계기가 됐다.

 

▲ 다재다능한 학창 시절

 

그는 제주북교와 오현중, 오현고를 다녔다.

 

학창시절 체육, 음악, 웅변 등 예체능에도 소질을 보였다.

 

유년시절부터 돼지오줌통으로 공을 만들어 축구를 좋아했고, 탁구 선수, 농구 선수로 출전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는 전도체육대회에서 동료들과 농구 경기에 참가, 포워드로 뛰면서 우승을 일구기도 했다. 오현브라스밴드 일원으로 작은 북을 치는 막내로 인기를 끌었고, 전도 예술제에는 ‘오 솔레미오’를 열창하기도 했다.

 

특히 전도 영어웅변대회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1등의 영예를 안았다.

 

당시 아버지의 친구이자 제주 출신으로 훗날 공군 소장, 상공부 장관, 국무총리서리를 역임한 박충훈 전 총리로부터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아 영어 공부에 매진한 결과였다. 박 전 총리는 부모님이 경영하시던 ‘평양냉면옥’을 찾아 냉면을 드시면서 그에게 영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양영식 전 통일부 차관(사진 오른쪽)이 1999년 5월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있다.

▲ 불의에 항거한 4·19세대

 

1959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해 1963년 졸업하기까지 과정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2학년이던 1960년 4·19혁명 전날 4·18 고대 데모 선봉대로 참가한 것이다.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로 이승만 대통령, 이기붕 부통령이 당선되자 전국적으로 규탄 목소리가 커진 가운데 그와 대학 동료들도 연일 시국 토론을 하며 자유당 정권을 성토했다.

 

당시 ‘한국 민주주의는 고목에 핀 곰팡이’, ‘3·15 선거는 때묻은 더러운 승리’ 등 내용을 담은 외신 보도에 충격에 빠졌고, 한국 정치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가운데 4월 18일 교내 인촌동상 앞에서 선배들의 4·18 선언문 낭독을 지켜봤고, 2학년생들이 앞장서 ‘민주역적 몰아내자’ 문구가 쓰인 플래카드를 들었다. 그는 구호 선창 임무를 맡았고, 교문을 나와 동대문에서 종로까지 시위에 참여했다.

 

그 후 잠시 피신 차 고향 제주로 내려왔는데 제주대학생들이 관덕정에서 주도한 시위에도 참가했다. 지역 선배들의 권유로 군중 앞에서 “오늘 낮까지도 저는 제주 청년, 제주 출신 대학생임을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저는 반독재 민주의 제주인, 자유 정의의 제주인, 용기의 제주인 대열에 함께 서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즉석 연설했다.

 

그는 대학에서 동료, 선후배들과 동아리 ‘사조연구회’에도 참가, 민주주의와 평화, 통일에 대해 깊이있게 고민하기도 했다.

 

그는 2010년 뒤늦게나마 4·19혁명 국가 유공 건국포장을 받았다.

 

▲ 통일부에 몸담다

 

그는 1971년 고려대 대학원 정외과에서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 연구’로 정치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이후 이듬해 통일부(국토통일원) 보좌관을 시작으로 2001년 퇴임할 때까지 30년간 ‘통일꾼 머슴’의 길을 걸었다.

 

대변인·교육홍보실장·통일정책실장·남북회담 사무국 상근대표·민족통일연구원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친 후 1999년 통일부 차관에 올랐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의 직접적인 인연이 없었지만 통일 전문가로서의 자질과 묵묵히 열심히 일해 온 점이 인정돼 발탁된 것이다.

 

1985년 비동맹 독립국가 수상과 외상들이 중심인 인도네시아 반둥회의에 정부 대표단으로 참가, 북측과 의미 있는 만남을 가진 일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그는 당시 정부 수석 대표인 이세기 통일원장관과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수립해 이산가족 문제를 접근하기로 했다. 손성필 북측 적십자회 중앙위원장과의 대화를 통해 그해 적십자회담이 재개되고, 이어 남북 분단 사상 최초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단의 교환 방문이 실현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당시 남측 35명과 북측 30명만이 가족을 만났다. 제1차 고향방문단 교환 후 2차 방문단에 대한 협의가 있었지만 이루어지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그는 공직 재직 기간에도 자기계발에 노력해 1988년 건국대 대학원에서 ‘역대 정부의 통일정책 변천과정 연구’를 통해 정치학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1993년에는 미국 버클리대학 한국위원회 초청 남북한 대표 통일 문제 심포지엄에도 정부 대표로 참가, 북측 대표들과 접촉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 양영식 전 차관(사진 앞줄 오른쪽)이 2000년 5월 남북정상회담준비기획단장 겸 준비접촉 수석대표로 판문점에서 북한 관계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

▲ 남북정상회담을 성공으로 이끌다

 

그는 통일부 차관이던 2000년 4월 남북정상회담준비기획단장 겸 준비접촉 수석대표를 맡게 된다.

 

비교적 온화한 성격에 달변인데다 과거 반둥회의 참석 경험 등을 살려 우리측 회담 기조를 북측에 차분히 설명하면서 회담을 매끄럽게 이끌어 갈 적임자로 판단된 것이다.

 

그는 4월 22일부터 5월 18일까지 판문점에서 북측과 다섯 차례의 접촉을 가졌다. 우여곡절 끝에 마지막 5차 접촉에서 북측과 실무 절차 합의서를 타결지었을 때는 정상회담을 향한 의미 있는 방침들을 놓았다는 감회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서해 직항로를 통한 서울~평양 간 항공기 운항, 우리 측 인원에 의한 상봉·회담의 생중계, 분단 사상 최초의 위성 통신망 구성·이용 등은 과거와는 다른 파격적 합의로 평가했다.

 

당시 준비 접촉 기간 양측의 환담 내용도 화제였다.

 

북측 김령성 단장은 “우리 말에 ‘천리비린(千里比隣)’(멀리 떨어져 있는 곳도 이웃처럼 가깝게 느끼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며 “좋은 길동무가 되자”고 덕담을 건네왔다.

 

쌍방 통행적 역지사지(易地思之) 자세를 강조했던 그는 “이미 판문점을 향한 땅길을 뚫려 있고, 금강산을 향한 바닷길로 열려 있는데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하늘길도 열리고, 또 끊어진 기차길도 연결돼 명실상부한 사통팔달의 남북협력시대를 활짝 열어나가자”고 화답했다.

 

결국 2000년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평양에서 분단 55년 만에 처음 이뤄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의 역사적인 첫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에 기여했다.

 

두 정상은 6·15 공동선언을 통해 자주적인 통일 문제 해결,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 방향에서의 통일 지향, 이산 가족과 친척 방문단 교환 및 비전향 장기수 문제 해결, 경제 협력과 사회·문화·체육·보건·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 활성화 등을 합의했다. 이에 따라 이산가족 첫 상봉 이후 15년이 지난 2000년 8월 역사적인 이산가족방문단 교환이 성사됐다.

 

6·15 공동선언 후속 조치로 남북 고위급 회담이 잇따라 제주에서 열리면서 제주가 남북 평화의 상징이 되는듯 했다. 2000년 9월 25일. 사상 처음으로 남과 북의 국방장관이 제주에서 역사적인 첫 회담을 가졌고, 같은 달 27일부터 30일까지는 제3차 남북 장관급 회담이 개최됐다.

 

그러나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 약속 불이행, 핵·미사일 등 문제를 포함한 군사적 긴장 완화와 평화 정착 문제에 대한 공동선언 미반영, 대북 비밀송금사건 등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 통일운동의 한길

 

그는 2001년 공직을 떠난 후에도 통일부에서의 경험과 노하우를 살려 통일꾼으로서의 한길을 걷고 있다.

 

민주평통 상임위원 및 기획특별위원장을 지냈고,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비상임자문위원으로도 활동해왔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2014년부터 통일선교아카데미 원장을 맡아 70대 중반에도 왕성한 활약을 보이고 있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대비해 통일선교 전문사역자 양성, 통일선교 전략 연구 개발, 통일선교 환경개선, 영역별 네트워크 구축 등에 힘을 보태고 있다.

 

2001년부터 2007년까지 고려대 북한학과 객원 교수, 2002년 미국 존스홉킨스대 국제대학원 객원연구원을 역임했고, 지난해 총회신학대 신학대학원 초빙교수를 맡았다.

 

그는 “북한 동포들의 영혼 구원과 복음 통일의 길에 밀알이 되겠다”고 말했다.

 

그는 1997년 ‘통일정책론:이승만 정부로부터 김영삼 정부까지’, ‘민족 화해와 통일을 위하여’, ‘평화통일과 북한 복음화’를 펴냈고, 2003년에는 ‘남과 북, 하나가 되는 길’을 통해 국민의 정부 대북 포용정책을 소개했다.

 

▲ 끝없는 고향 사랑

 

그는 고교 졸업 이후 서울에 생활하면서도 고향과 제주인에 대한 남다른 사랑을 간직해왔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제주인 모임을 만드는데 적극적이었고, 구심점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1978년 재경 제주도민들로 한라축구회를 조직, 축구를 통해 두터운 제주인의 우의를 다졌다. 당시 5회에 걸쳐 회장직을 연임하면서 재경 제주 젊은이들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1991년에는 제주를 가장 살기 좋은 평화·번영·복지의 섬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설립된 사단 법인 제주국제협의회에도 적극 참여, 2001년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재경 제주출신 공무원 모임인 제공회 회장, 재경제주시향우회장 등도 맡아 고향 발전에 기여해왔다.

 

그는 2005년 정부가 제주도를 세계 평화의 섬으로 지정하자 그동안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각계 인사 24명과 함께 제주도로부터 공로패를 받았다.

 

자신의 아호를 ‘섬돌’로 지은 그는 ‘제주사랑 나라사랑’, ‘내사랑 돌하르방’을 발간하기도 했다. 그는 제주가 관광지이면서 동시에 각종 국제기관이 모여 있는 아시아의 제네바가 되기를 꿈꾸고 있다. 그는 “앞으로 한민족의 보물섬 제주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고, 유엔 국제기구의 평화 학술대회가 개최되는 등 세계평화의 섬으로 더욱 발전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재범 기자 kimjb@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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