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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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의.수필가

우리 속담에 ‘기름 먹인 가죽이 부드럽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뇌물을 주어야 만사가 순조롭다는 뜻을 내포한다. 철저한 유교 왕국인 조선왕조 오백년사에도 뇌물이야기는 그칠 날이 없었다.

조선 문학사에서 뇌물에 대한 대표적인 묘사는 춘향전이다. 성춘향이 변 사또의 수청을 거절하자 사또는 춘향에게 곤장을 치라는 태형을 내린다. 춘향이 형틀에 엎드렸다. 그때 춘향 모 월매가 곤장을 든 집장사령 옆구리에 엽전 한 움큼을 찔러준다. 뇌물 받아먹는 데 이골이 난 집장사령은 “하나요, 둘이요” 소리만 쩌렁쩌렁 울렸지 곤장은 치는 시늉만 냈다. 이게 다 춘향 모 월매가 찔러준 엽전의 효력이었다.

젊으나 젊은 여인의 엉덩이에 집장사령이 곤장을 곧이 곧대로 내리쳤더라면 그 엉덩이가 온전했을까. 월매는 딸의 엉덩이 보전을 위해서 기지를 발휘했던 것이다. 그래서 성춘향의 엉덩이는 온전했고 암행어사가 되어 금의환향한 이몽룡을 만나는데 전혀 탈이 없었다.

춘향 모의 엽전 몇 푼이야 소설 속 화두지만 임금도 뇌물로 난관을 타개한 기록이 있다. 관형향배(觀形向背)의 실리외교를 펼쳤다는 조선 15대왕인 광해군은 즉위는 했어도 명(明)의 승인을 득하지 못했다. 승인불가 이유가 장자(長子)가 아니라는 게 빌미였다. 명에서는 차자(次子)가 왕위에 오르게 된 연유를 밝히려고 사신을 보낸다.

임금과 대신들이 구수회의를 했다. 회의결과는 뇌물을 주어 보내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재정형편에 바리바리 뇌물을 실어 보내야 했던 임금의 심중인들 오죽했으랴. 뇌물을 보내고 나서야 광해군은 조선 15대왕으로 명의 인증을 받았다.

이렇듯 뇌물은 국가 간의 외교에도 한몫을 단단히 했다. 주고받기만하면 만사형통인 뇌물의 위력을 잘 아는 옛 어른들이 ‘기름 먹인 가죽이 부드럽다’라고 했던 건 실체적 체험에서 터득한 달관이었다.

역사적으로 뇌물이야기는 조선왕조 후기에 그 도가 절정에 이른다. 의주부윤을 지낸 심 아무개는 재직 당시 정부의 쌀로 고리대금 했던 게 발각되어 종로에서 곤장 백대를 맞고 제주도로 유배된다. 하지만 그는 제주 유배 일 년 만에 해배되어 한성판윤, 지금의 서울특별시장으로 영전한다. 여기에 뇌물의 작용했으리라는 후일담이 왜 없었겠는가. 이것이 1865년의 일이다.

또 한 사람 뇌물의 달인이 있었다. 1887년 이 아무개는 뇌물죄로 제주에 유배되긴 했으나 곧 해배되어 친위대장이라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에 부임한다. 지금의 경찰청장에 해당하는 자리다. 뇌물의 위력과 그 위세를 과시한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가하면 뇌물과 담을 쌓았던 청백리도 있다. 조선 중종 때 정붕(鄭鵬)은 청송부사로 재임 중에, 청송 특산물인 잣과 꿀을 보내달라는 좌의정 성희안(成希顔)의 서찰을 받는다. 정붕은 그 자리에서 답장을 썼다. “잣은 높은 산꼭대기에 있고 꿀은 백성의 집 벌통 속에 있으니 내가 부사인들 어찌 그것들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답장을 보내고 정붕은 그 날로 부사직을 사임했다.

아직은 이른 감이 없지 않으나 부정청탁금지법(김영란 법)이 시행되면서 뇌물 얘기가 사그라질 기미가 엿보인다. 서로 몸을 사리는 암묵적 정서가 흐르는 형국이니 말이다. 더불어 ‘기름 먹인 가죽이 부드럽다’는 속담도 머지않아 소멸될 거라는 기대를 해 보는 건 김칫국부터 마시는 우(愚)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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