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석돌을 채취하기 위해 바위에 알기로 구멍을 뚫은 모습.(산방산)

제주도에서는 돌일을 하는 사람을 일러 ‘돌챙이’라고 부르지만 약간의 비어(卑語)적 의미가 들어있다. 돌챙이라는 말은 옛날 석장(石匠)이라고 하는 ‘돌장인’에서 유래한 제주어 변음(變音)이다. 돌챙이의 다른 한자 표기로는 석수(石手)와 석공(石工)이 있다. 석공은 현대식 용어로 회사나 공장의 분위기가 풍긴다. 돌일로는 밭담 쌓기, 산담 쌓기, 집의 축담(築垣), 축성(築城), 비석 제작, 무덤 석물 제작 등을 들 수 있다. 대부분의 석공은 집을 지을 경비가 없어 돌집을 손수 지으면서 손재주를 스스로 알게 된 사람, 집안이 가난하여 농사일보다 일당이 좋아 석공이 된 사람, 석공을 따라다니면서 배운 사람, 산담접에 참여하면서 돌일을 했던 사람 등이다.


돌일은 도급제(都給制·일본말로 우케도리受取り)와 ‘역시계(役事契)’에 의해 진행된다. ‘우케도리’는 능숙한 석공이 여러 명의 예하 석공을 거느리고 다니면서 산담이나 축담, 돌담을 쌓는 사조직의 방식이다. 산담접은 기금을 모으기 위해 친목으로 조직된 프로와 아마추어 산담쌓기 조직을 말한다. 이들은 주로 건장한 청년들로 조직되거나 친분 있는 사람이나 동창들로 구성되며 일정 금액을 받고 산담을 쌓아준다.


제주도 돌챙이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그것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은 18세기 초 이형상 목사의 저술인 ‘남환박물(南宦博物)’에 나온다. ‘공방(工房)의 각 공장(工匠)은 448명이다’라는 기록이 있으나 공장의 종류는 세부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448명의 공장(工匠) 속에는 아마도 돌챙이(石手)가 포함돼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도 동챙이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19세기 중반 ‘탐라영사례(耽羅營事例)-반액(班額)조’에, 제주영(濟州營)에 소속된 돌챙이(石手)의 수는 ‘석수(石手) 7인’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그보다 몇 년 늦게 발행된 ‘탐라사례(耽羅事例)’에는 그 수가 3인이 더 늘어난 ‘석수(石手) 10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수치는 제주영(濟州營)에 소속된 공식 장인들의 숫자로서 이들은 제주영의 돌일을 주로 담당하였다. 그러나 돌이 많은 제주도 전체로 볼 때 돌을 다루는 아마추어 석공들이 꽤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들은 주로 민간에서 문·무인석과 동자석, 비석 등을 만들거나 축담, 밭담, 산담 쌓기 등 여러 가지 유형의 돌일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억나는 제주의 석공으로는 강승도, 강영택, 김창구, 송종원, 이재수, 임영석, 장공익, 정상헌, 조창옥 선생 등이 있다. 제주의 마을에는 전문적으로 돌일만 하는 석공이 있었는가 하면 비석을 만드는 석공, 산담접을 만들어 돌담을 쌓았던 이름 모를 석공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돌일이 힘들고 일거리도 줄어들면서 돌일을 계승하려는 사람들도 점점 없어져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그러다보니 석상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의 맥도 끊어졌고, 돌담을 쌓는 방식도 점차 전통에서 멀어지고 있다. 도로 공사 현장을 보게 되면 오히려 일본식 견치담으로 축담을 쌓는 것을 쉽게 목격할 수가 있다. 밭담이나 산담은 조경용이나 도로 매립용으로 실려 가고, 그 자리에는 적당히 쌓은 어설픈 돌담이 이빨 빠진 채 불안하게 서 있다가 약한 바람에도 쉽게 무너져 내린다.


동자석을 마지막까지 만들었던 고흥옥 선생(2007년 작고)은 사망 직전까지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에 거주하였다. 그는 20살 넘어 자신의 집을 지을 때부터 돌일을 시작했는데 나이 들어 관절염으로 그만두게 되었다. 처음에는 돌 깨는 일을 하다가 4·3 이후 돌담을 쌓았다. 그러던 중 마을 사람의 주문으로 동자석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동자석이나 문인석을 만드는 법을 누구로부터 배운 적이 없었고, 또 제주에서 배울 만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오로지 눈으로 보고 감을 잡아 만들었다. 1950년 이전에는 돌 깨는 일당이 3원~4원50전이었고,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10원의 일당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도 농사짓는 것보다 돌일이 더 수입이 좋았다.


처음 동자석을 만들 때는 동네 바닷가인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 ‘당디(고냉이 성창)’라는 곳에서 생돌(生)을 캐어다 쓰다가, 인근 마을 북촌리 ‘빌레두리’ 라는 곳에서 돌을 채취하여 석상을 만들기도 하였다. 또 현무암은 무거워 운반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훨씬 가벼운 ‘속돌(땅에 묻힌 송이석)을 캐어다가 석상과 상석, 비석 받침대를 만들기도 하였다. 속돌은 우진재비오름, 검은오름 분화구 주변에서 캐었다. 고흥옥 선생이 만든 동자석과 문인석, 망주석은 제주도 동부지역 무덤에 많이 전해온다. 제주시 영곡공파 선조 무덤, 함덕리, 선흘리 마을 주변의 무덤에서 고흥옥 선생이 만든 동자석, 문인석, 망주석 등의 석물을 볼 수 있다.


고흥옥 선생이 만든 동자석은 각주형(角柱形)에 민머리를 하고 긴 홀을 들고 있다. 어깨에는 직선의 띠를 새겼다. 옷깃은 직선으로 처리하여 단순하고 간결한 맛이 난다. 1980년대 이후 장묘제도의 변화로 인해 동자석을 세우는 사람이 없어 더는 동자석을 만들지 않았다. 돌하르방과 동자석을 모방하는 석재사들이 더러 있으나 옛 석상처럼 창의적이거나 운치가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외형을 겨우 모방하는 수준에 그친다.


 

   
▲ 故 고흥옥 석장의 도구.

▲돌챙이 도구


예로부터 제주는 쇠가 귀해서 도구들이 보잘 것 없었고 돌을 캐거나 다듬을 때 모든 일을 손으로 했다. 석공 개인이나 지역에 따라 명칭, 모양이나 크기가 차이가 있다. 


△도구의 이름
돌일을 할 때 쓰는 도구로는 지게(농사와 겸용), 큰메, 겐노, 망치, 노미(끌), 작은 알기, 중 알기, 큰 알기, 철기 등이 있다.


지게: 길이 90cm, 두께(등~짐받침대) 44cm, 아래폭 51cm 


큰메: 길이 77cm, 망치 길이 27cm, 망치 두께 7cm, 무게는 3관에서 4관이 나가고 손잡이 나무는 윤놀이 나무로 만든다. 장력이 좋기 때문이다.  


겐노: 길이 64cm, 망치 길이 19.5cm, 망치 두께 4.5cm 


망치: 길이 25cm, 망치 길이 12cm, 망치 두께 3.5cm 


큰 노미: 길이 27.5cm, 두께 1.8cm


노미: 길이 18cm, 폭 2.2cm


작은 알기: 길이 6cm, 두께 3.5cm


중 알기: 길이 8cm, 두께 4cm


큰 알기: 길이 17.3cm, 두께 5cm 


△도구의 용도
큰메: 생돌을 깨기 위해 박은 알기를 때리는 도구


겐노: 담을 쌓을 때 다듬는 도구


알기: 돌의 구멍을 뚫거나 구멍을 넓히는 데 사용하는 도구


망치, 노미: 알기 구멍 뚫기, 중간 알기에 맞게 하다가 구멍이 커지면 큰 알기로 친다. 작은 알기는 떼어 낸 돌을 다시 쪼갤 때 쓴다.


납작한 노미 : 평끌 정(일자담은 겐노로 치고 평끌로 다듬는다.)


철기 : 돌을 떼어 낼 때 일리는(들어 올리는) 긴 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