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성내 방어유적 중 처음으로 복원된 제이각 전경.

제주시 이도1동 오현단 맞은편에 있는 제이각(制夷閣)은 성벽으로 오랑캐(왜구)를 물리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1599년 제주성과 산지천 남수구(수로)를 방어하고 감시할 목적으로 세워졌다. 그해 3월 부임한 성윤목 제주목사는 “고을 성을 더 쌓고 성 위에 격대를 설치해 제이정(制夷亭)을 지었다”고 기록했다.

세월 속에 묻혔던 제이각은 2014년 제주성지(濟州城址) 동쪽 치성(雉城·성벽 바깥에 덧붙여 쌓은 성곽)에서 터가 발견돼 복원사업이 본격화됐다. 발굴 터에는 凸모양의 기단석렬과 주춧돌 6개가 나왔다.

제주시는 7억원을 들여 416년 만인 2015년 12월 제이각을 복원하고 현판식을 가졌다. 현판은 현병찬 서예가가 썼다. 제주성내 방어용 건축물이 복원된 것은 제이각이 처음이다.

제이각의 건축면적은 43㎡로 사방을 감시할 수 있도록 문과 벽이 없이 높게 지어진 정자로 건물은 T자형으로 연결됐다.

성 위에 망루를 설치해 감시초소 역할을 한 제이각은 방어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555년 6월 60여 척의 배에 나눠 탄 왜구 1000여 명은 제주의 관문인 화북포로 침입해 산지천 남수각 동쪽 언덕에 진을 치고 제주성을 3일간 포위하는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관군은 치열하게 싸웠으나 왜구를 물리치지 못했다.

이때 미천한 신분이자 갑사(甲士·직업 군인)인 김성조 등 효용군(驍勇軍·용맹스런 군인) 70명이 적진으로 돌격해 왜구에게 타격을 가했다.

정병(正兵) 김몽근은 붉은 깃털을 단 투구를 쓴 적장을 활로 쏘아 넘어뜨리자 왜구는 물러났다.

을묘왜변을 계기로 제이각 건립 등 방어 시스템이 구축됐다.

 

   
▲ 2015년 12월 416년 만에 복원된 제이각에서 현판식이 열린 모습.

그런데 400여 년이 흘러 세상에 드러난 제이각을 놓고 명칭 문제로 논란이 불거졌다.

일본에 소장된 18세기에 제작된 제주목 도성지도(濟州牧 都城之圖)에는 제이각 대신 ‘청풍대(淸風臺)’라고 표기됐기 때문이다.

청풍대는 선조들이 풍류를 즐기던 장소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에 따라 원래 이 터에는 제이각이 있었으나 허물어진 후 청풍대라는 명칭의 건물이 들어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명칭을 놓고 1년간 논란이 이어졌고, 건물 복원 계획은 3차례나 반려됐다.

제주도문화재위원회는 처음 정자를 조성한 목적이 방어시설인 점을 감안, 제이각으로 복원하는 게 합리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400년 넘게 묻혀있던 방어 유적이 빛을 보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