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관묘를 두른 산담. 석관묘는 빈부나 계급적 차이를 추정할 수 있는 묘제이다.

▲장법, 시신 처리 방식, 장법 
장법은 종족, 지역, 문화, 환경, 종교, 시대에 따라 실로 다르게 나타난다. 이 세상에 온 사람들의 수대로 죽음은 다시 사람들을 거느리고 흘러가듯 시간의 바다를 건넌다. 삶의 끝이 죽음의 시작인 한 삶과 죽음은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의 역사적 근원이다. 세상에는 죽음의 신비, 공포, 회한이 있고 주검을 잘 보내기 위한 장법도 매우 다양하다.  


독수리에서 시신을 맡기는 티베트의 천장(天葬)이 있고, 발리의 풍장(風葬), 오늘날 해군에서도 거행하고 있는 수장(水葬), 시신을 숨기는 몽골의 심장(深葬), 가장 일반적인 매장 등 장법은 시신을 처리하는 방법으로 인류의 문명과 역사, 생활과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 우리는 오래된 옛 무덤을 고분(古墳)이라고 부른다. 옛날 사자(死者) 고분의 형태는 신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흙을 파 구덩이에 묻는 매장이 선호되었다. 제주의 무덤 또한 매장을 기본으로 한 장법이지만 산담을 울타리로 사용했다는 점이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방식의 장법이다. 


죽은 사람을 매장했던 증거가 발견되는 시기는 호모사피엔스 단계부터이다. 호모사피엔스는 플라이토세 중기 말엽에 살았던 고인류로 현생 인류에 가까운 인간인 이들이 등장한 시기는 40~25만년 전경이다. 이들은 언어의 구사와 예술 행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구조물을 건축했으며 그들의 사회는 구조화된 집단화를 이루었을 가능성이 크다(국립문화재연구소, ‘韓國考古學事典’, 2001). 신석기 시대는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농경을 시작하고, 종교적 이념이 퍼졌으며 도구가 발달하고 구성원들의 계급이 분화되었다.


청동기 시대가 되면 무덤의 형태는 고인돌이나 석관묘인데 이들 무덤에 민무늬토기, 마제석검, 돌화살촉, 곡옥(曲玉)이나 관옥(管玉)을 비롯하여 경우에 따라 비파형 동검이나 청동기류가 부장되기도 한다. 초기 철기시대의 지배자 무덤에는 세형동검(細形銅劍)과 각종 무기류, 그리고 청동거울과 청동방울을 중심으로 한 제의도구류 등 청동기 유물이 함께 부장돼 있다. 


삼국시대 무덤의 부장품은 양적으로 많이 증가하고 그 종류도 다양했다. 삼국시대 고분의 부장품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묻힌 사람의 몸 장식, 둘째, 사후세계를 위해 준비한 부장품, 셋째, 무덤 제사를 위해 바치는 제물 등이 그것이다(국립문화재연구소, ‘韓國考古學事典’, 2001).


정리하면 선사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보편적인 장법은 토장(土葬:매장)인데, 토장은 시신이 직접 흙과 닿기 때문에 사람의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렵지만 지금까지 세계 각지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장법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돌을 쌓아 시신을 가리는 적석총(積石塚)이 있다. 이 장법은 구덩이 없이 시신을 그냥 놓고 돌을 덮는 방식으로 토장법과 함께 가장 오래된 원시적인 장법이다. 적석총은 추운 지방에서 주로 행하는 장법이다.

 

이런 장법은 시베리아 초원지대에서 널리 보급되었고, 바이칼 지방에서는 신석기 시대 초기부터 나타나 기원후 약 3천년 동안이나 유행했으며,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의 적석총도 이 시베리아에서 남하해 온 전통이다. 그리고 석관(石棺)을 이용한 장법인 석관묘는 빈부나 계급적 차이를 추정할 수 있는 묘제이며, 석곽(石槨)은 관을 넣는 돌로 된 곽을 말하는 것으로 삼한시대에서 삼국시대를 거쳐 기본적인 고대 묘제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정상적인 죽음이 아닌, 병사(病死)나 횡사(橫死)에 주로 쓰이는 항아리를 이용하는 장법인 옹관묘(甕棺墓)는 주로 어린 아이의 시신을 처리하는 특수한 장법으로 알려졌지만, 특정 지역의 유행을 보이면서 삼국시대까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또한 토광묘와 개념이 같은 토광목곽묘(土壙木槨墓)는 청동기 시대 후기부터 초기 철기시대에 걸쳐 새로 유행한 특수한 묘제로 장방형의 광(壙)을 파고 판자나 각재로 상자형의 목곽을 짠 것이며, 내부에는 한 개 또는 두 개의 목관을 넣고 그 위에는 봉토를 올리고 있다. 이 토광목곽묘는 고대 북아시아에서 유행된 목곽분(木槨墳)의 전통에 속하는 것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위만조선이나 낙랑군 시대 권력자들의 무덤에 나타난다.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라고 하면 문헌상 삼한시대이고, 이 시기는 역사상 과도기라는 이유에서인지 혹은 실질적인 왕국의 형성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인지 거대한 봉토분의 출현을 볼 수 없다(국립문화재연구소, ‘韓國考古學事典’, 2001).

 

   
▲ 국립제주박물관에 소장된 철기시대 제주 옹관묘.

▲제주의 선사시대 장법
제주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부터이다. 대개 25,000년 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제주 지역의 구석기 유적의 조사는 1973년부터로, 고고학자 정영화에 의해서 빌레못 동굴의 발굴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105점의 뗀 석기와 갱신세 중기의 갈색 곰 뼈를 수습하였다. 이 석기들은 모두 현무암제로써 편년은 대략 중기구석기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후대의 연구자들은 빌레못동굴의 뗀석기가 구석기 시대의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고 있다.

 

제주 곳곳에서 미약하나마 구석기 유물들이 수습되고 있는데 천지연 유적, 후에 생수궤 유적으로 명명된 곳에서 좀돌날 1점, 격지 찍기 등, 제주시 삼화지구 택지개발사업부지 나-1구역에서 검은 조면암 몸돌 1점, 제주시 외도 운동장부지에서 조면암 자갈로 만든 외날 찍기 1점을 수습하여 구석기 시대에 서서히 다가서고 있다(국립제주박물관, 2009). 그러나 구석기 시대의 제주의 장례에 대해서는 실증적으로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 생로병사의 진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한계는 태어나면 죽기 때문에 엥겔스가 말하는 ‘야만 단계’라 하더라도 가족, 동료들의 주검은 어떤 식으로든 처리했을 것이다.  


신석기시대 옹관묘와 관련하여 제주의 장례 문화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유적은 성읍리 유적이다. 이 유적은 제주시 방향에서 성읍리로 들어서는 마을 초입부에 형성되었다. 해발 135m 중산간 지역에 위치하는 이 유적은 이 마을을 끼고 흐르는 천미천을 중심으로 신석기 유적이 확인되고 있다. 이 성읍리 유적에서는 다수의 신석기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주목을 요하는 것이 옹관(甕棺) 토기이다. 옹관으로 보이는 토기는 몸체가 둥근 발형(鉢形)으로 그 안에는 잘게 부서진 뼈들이 가득 들어 있었는데 그 뼈 가운데 인골(人骨)조각으로 보이는 불탄 뼈가 섞여 있었다. 신석기 시대 옹관묘는 한반도 남해안의 진주 대평면 상촌리 유적에서 확인된 바 있다(국립제주박물관,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