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축 방묘를 두른 산담. 조선초 문씨와 고씨 집안에서 유교식 상장례가 시작되면서 제주지역에 무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유교의 이입 경로
조선조 상·장례의 등장 시기는 제주의 민묘의 출현과 이해하는데 중요한 시각을 제공한다. 우리나라에 유교식 상·장·제례가 처음 보급된 것은 고려시대다. 원래 우리나라에서 공자의 가르침이 처음 시작된 것은 삼국시대 중엽에 이른다.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 48년(626), 고구려 영류왕(榮留王) 14년(631), 백제 무왕 32년(631)에 비로소 자제들을 당나라의 국학(國學)에 유학시켰고, 이 시기 이후 당나라 태종이 국학을 증축하여 경학(經學)을 확장하자 선덕여왕 9년(640) 삼국의 자제들이 중국에 유학하면서 경학(經學)을 배우게 된다. 이것이 경학 중흥의 시작이다. 경학(經學)이란 성인과 관계가 깊은 고전에 대하여 해석을 내리는 학문으로 전한(前漢) 초기부터 시작하여 한무제(漢武帝) 때 그 기틀이 잡혔다.

 

유교라는 말 이전에는 제자백가의 하나로 불렸는데 한비자의 법가(法家), 묵자의 묵가(墨家)라고 하듯 공자가 중심이 된 사상이라는 의미로 유가(儒家)라 했다. 즉, 공자가 편찬한 ‘詩’, ‘書’가 유가(儒家)들에 의해 읽히면서 ‘詩經’, ‘書經’이 되었고 차차 유가의 독점물이 됐다. 경학은 바로 경전을 공부하고 해석하는 유교의 학문을 말하는 명칭이 되었다(加地伸行·1996). 


유교(儒敎)라는 명칭은 5~6세기에 불교·도교라는 명칭과 관련해 탄생했다. 석가와 노자가 아닌 주공과 공자의 가르침이라는 의미로 유교라고 명명됐다.


그러다 근대로 오면서 가톨릭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敎’라는 말이 종교적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고 석가나 노자와 같이 종교적 목적이 아닌 공자의 가르침(敎說)을 유교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유가(儒家)나 유학(儒學)으로 불러야 한다는 견해가 생겨났다(溝口雄三·2011). 다시 말해 공자의 가르침이 유교, 유학, 유가라는 여러 명칭 때문에 헷갈리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을 ‘종교로 볼 것이냐’, 아니면 ‘사상으로 볼 것 이냐’라는 이유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유교적 원류를 장지연(張志淵)의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에 보면, “신라 원효대사의 아들 설총(薛聰)이 ‘유교로써 세상이 스승이 되었는데, 즉 유교의 종주(宗主)다.

 

왕건이 일으킨 고려시대가 되면 다시 불교의 숭상으로 인해 유교의 도(道)가 쇠약하다가 고려 6대 성종(成宗)에 이르러 공자가 부활한다. 이때 고려의 서울에 국자감(國子監)을 두자 주군(州郡·지방)의 자제들이 서울에 와 공부를 하였다. 또 12목(牧·고려시대 행정단위)에 경학박사(經學博士)를 두어 지방 자제들을 교육했다. 이후 안향(安珦)에 의해 유학의 기틀을 마련하고, 이재 백이정(白이正)이 원나라에 유학하여 정주학을 배워왔다. 공민왕이 성균관을 세우고 영남의 선비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박상충(朴尙衷), 이숭인(李崇仁) 등으로 하여금 학관(學官)을 겸하게 하였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으로 하여금 대사성(大司成)을 삼아 경서(經書)를 나누어 공부시키고 강론(講論)을 토론하니 정주(程朱)의 학문이 이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또 “즉, 포은 정몽주가 우리나라 이학(理學)의 종주(宗主)인데 송나라 유학인 정주학(程朱學)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포은의 학문이 다시 야은(冶隱) 길재(吉再)에게 전하고, 야은(冶隱)은 다시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에게, 강호(江湖)는 그의 아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에게, 점필재는 다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에게, 한훤당(寒暄堂)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에게 이어졌다. 이 계보가 포은(圃隱)의 이학(理學)의 적통(嫡統)”이라고 했다.

 

   
▲ 조선왕조실록 문방귀의 3년상 기록.

▲제도는 통치의 목적
모든 국가의 제도는 통치의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한번 만들어진 제도는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단번에 폐기되지도 않으며, 쉽게 고치기도 어렵게 된다. 국가 통치는 제도들의 연결망을 통해서 법의 통제를 받지만, 절대 군주의 시대는 법보다 군주의 판단이 더 우위에 있다. 하지만 이미 제도가 고착되면, 특히 조선시대 상·장례 제도와 같이 조선 왕조의 정체성을 지키는 정치적 토대가 되기 때문에 제도 정비가 매우 어렵다. 하나의 제도가 관습이 되고 문화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조선의 상·장례와 연관해서 ‘고려사절요’의 기록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처음 3년상을 도입한 것은 고려시대였다. 하지만 ‘공민왕 1년(1357) 10월에 간관(諫官) 이색(李穡) 등이 3년상을 행하도록 하자고 청하여’ 그 말을 따랐으나 그것은 한동안 지켜지지 않았다. 새로운 문화(유교)와 토착문화(불교)가 문화충돌을 빚었고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격식 때문에 국가의 손실이 큰 고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민왕 2년(1360), 8월에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사방에서 전쟁이 일어나 사람을 급하게 써야 하니. 3년상 제도를 없애라.” 하였다. 이때 3년상을 허락하더라도, 모두 백 일 만이면 최복(衰服)을 벗고 벼슬만 쉴 따름이었다.’

 

즉, 전쟁으로 인해 사회가 불안하자 왕명으로 인해 3년상 제도에 변화가 일었다. 3년상을 핑계로 백 일 만에 상·장례를 마치고 남은 기간은 집에서 쉬는 관료들이 속출했기 때문이다


‘공양왕 1년(1389) 10월, 우리나라 사람이 3년상을 행하는 사람은 만 명에 혹시 한 명이 있을 정도이며, 국가에서 기복(祈福)의 법을 만들어 거상하려는 뜻을 빼앗는데, 만약 숭인에게 죄를 주고 반드시 3년 상을 행한 사람을 구하여 이를 쓰려고 한다면, 이는 만 명을 버리고 한 명을 얻는 것이므로 신은 주상께서 사람을 얻어 쓸 수 없을까 염려합니다.’ 라는 기록처럼 30여 년이 지난 공양왕 때에 이르면 3년상은 유명무실한 제도가 돼 이를 지키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고려시대가 불교를 중심으로 삼았던 국가라는 점에서 유교식 제도의 정착이 그만큼 어려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주도 상장(喪葬) 제도의 시작 
변방의 섬, 제주에 유교식 상장(喪葬) 제도가 시작된 시기는 조선 초기이다. 최초에 3년상이 문씨 집안과 고씨 집안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로써 제주에 무덤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세종실록(世宗實錄)’ 2년(1420) 정월 경신(21일)의 기록은 제주도 최초로 유교의 예제(禮制)를 받아들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전 주부(注簿) 문방귀(文邦貴)는 이곳(제주) 풍속이 3년상(三年喪)을 행하지 않지만, 병술년(태종 6년 1406년)에 아버지가 죽으니 3년 동안 무덤을 지키고(守墳), 상제(喪制)를 모두 ‘가례(家禮)’에 따라서 효도의 기풍(氣風)을 세웠다. 제주사람들이 이를 본받아 무덤을 지키는 자(守墳者)가 3인이요, 3년상을 행한 자가 10여 인이다.”


백나용 기자 nayong@jeju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