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자들이 사자(死子)에 대한 예의인 동관 모습.

순자는 “상례(喪禮)란 산 사람의 예절로써 죽은 사람을 섬기고, 되도록 삶을 모방하여 죽은 사람을 송별하는 것인바, 죽은 사람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 하고 없는 사람 섬기기를 잇는 사람 섬기듯 하여, 시작과 마지막을 한 가지로 여기는 의식이다.”라고 했다. 공자의 예사상은 순자에 의해 구체화 되었는데 예는 사회질서를 위한 제도도 인식함으로써 특히 상장 제례의 실천을 규범화시킨 사람이 순자이다.


▲기근, 사람의 의리까지 없애다
제주의 장법이 학장(壑葬)으로 비치는 일이 조선조 사회에서는 비일비재한 것 같다. 특히 한반도 어느 지역보다도 한발(旱魃)과 기근(饑饉)이 잦고 요역(?役), 신역(身役), 호역(戶役) 등 부역(賦役)이 심했던 제주는 하루하루의 삶이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기근에 대한 대처가 제주목사의 커다란 과제였고, 파견어사는 부역(賦役)의 폐단을 줄이고 민란을 잠재우기 위해 민중을 안심시키는 것이 큰 임무였다. 연이어 찾아오는 기근에, 죽은 시신을 묻을 여유가 없거나 손이 미치지 않아 그냥 시신을 방치한 것이 학장(壑葬)으로 비쳤을 것이다. 다음의 기록들은 기근 당시의 실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삶에 있어서 어떤 형식의 예의보다는 의식주 해결이 무엇보다 먼저 시급한 것임을 알려주는 좋은 사례다.


‘현종실록(顯宗實錄)’ 12년(1671) 4월 갑신(3일)조에 제주목사 노정이 급보를 올리기를, “본섬의 굶주린 백성 가운데 죽은 사람의 수가 2260여 명에 달합니다. 살아있는 사람도 귀신 몰골이고 닭, 개를 거의 다 잡아먹었고 계속해서 마소를 잡아서 목숨을 연장하고 있는데 사람들끼리 잡아먹을 우려가 당장 박두(迫頭)했습니다.” 같은 달(同月)에 전라감사 오시수가 급보를 올리기를 “떠돌아다니면서 걸식하는 백성들이 어린이를 내버려 두는 일은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예닐곱 살 난 아이들이 옷자락을 붙잡고 따라가는 것을 나무에다 비끄러매놓고 가기까지 하는가 하면, 부모와 형제가 눈앞에 죽어도 슬퍼할 줄 모르며 땅에 묻어줄 생각조차 하지 않으니 사람의 의리가 이렇게 까지 싹없어졌습니다.”


‘정조실록(正祖實錄)’ 12년(1788) 9월 무자(30일) 조에, 탐라에서 돌림병으로 백성이 많이 죽었다. 제주목사 홍인묵이 이를 아뢰니 하교하기를, “올해 병으로 인해 사망한 자는 별도로 존휼(存恤)을 더하고, 가난하여 아직 장례를 치르지 못한 자에게는 관에서 비용을 도와주어라”

 

   
▲ 바다를 향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표해비.

▲장례비용의 지원
위의 기록은 기근으로 시신을 그대로 길가에 내버려두고, 또 역병이 덮치자 가난한 백성들이 장례를 치를 수 없는 것을 보다 못해 내린 조치이다. 조선시대 장례비용을 도와주는 기관으로 귀후소가 전국에 있었다. 제주에도 이 귀후소(歸厚所)가 설치되었는데 이 귀후소(歸厚所)의 역할은, “귀후소. 상평창(常平倉)에 붙어있다. 관곽(棺槨) 및 모든 상구(喪具)를 예비하여 가난해서 갑자기 준비할 수 없는 사람들을 구휼한다.(歸厚所 附在常平倉 預備棺槨及諸喪具 以濟窮之不能猝辨者).”


상평창(常平倉)은 관아에 속한 사창(司倉) 중 하나다. 평상시에는 국법에 의해 실시하고, 흉년일 때는 기아자(飢餓者)를 구제하는 곳으로, 귀후소(歸厚所)가 소속돼 있다. 원래 귀후소라는 이름 전에는 귀후서(歸厚署)로 불렀고, 또 귀후서(歸厚署) 이전에는 관곽색(棺槨色)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 관곽색은 고려시대 기구였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관곽(棺槨)의 제조·판매와 장례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던 관청으로 태종 6년(1406)에 신설된 것이다. 이것이 1414년 시혜소(施惠所)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가 ‘경국대전’완성 전에 귀후서((歸厚署)였다가 그 후 귀후소(歸厚所)로 개칭되었다.

  
남만리(南萬里)의 ‘탐라지(耽羅誌)’에 돈이 없어서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사람들을 관청에서 특별히 은휼(恩恤)한 사례가 있다. “정조 임인년(壬寅年·1782) 4월에 혼기(婚期) 또는 장례시기를 놓친 사람들에게 특명으로 관청에서 비용을 돕게 했다. 제주에서 혼인하는 30인에게 질 좋은 무명 2필과 좁쌀 1섬을 도와주었고, 장례를 치르는 15인에게 질 좋은 무명 1필과 좁쌀 1섬을 도와주었다. 8월에 또 특교(特敎)로 혼기를 놓친 자는 면역(免役) 시키고 장례시기를 놓친 자에게는 공납(貢納)을 감면케 하였다.”


또 조선시대 제주도 매장문화와 관련해서는 이수광(1563~1629)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엿볼 수 있다. “주민들은 바다로 집을 삼아, 고기 잡고 해초(海草) 캐는 것으로 먹고 사는 업(業)을 삼는다. 해마다 풍랑에 떠내려가거나 물에 빠져 죽는 일이 많아서 남자로서 매장(埋葬)할 수 있게 되는 자가 적다. 그런 때문에 남자는 적고 여자는 많다.”


그리고 길운절, 소덕유 사건으로 민심을 다스리기 위해 제주안무어사로 왔던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남사록'서(序)에도 당시 제주의 무덤과 관련한 상황을 전해준다. “제주도민들의 무덤 가운데 남자의 무덤은 적고 여자의 무덤은 많으며, 과부는 매우 많고 홀아비는 극히 적다(島民男墓絶少 而女多墓 寡妻甚果多 而鰥夫獨甚少).”


▲무덤도 여자가 많은 이유

이 기록들을 토대로 16세기에 매장 문화가 보편적으로 시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 제주에는 남자들이 생업을 위해 바다에 나갔다가 빠져 죽는 일이 많아 시신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남자의 무덤보다 여자의 무덤이 많다는 사실을 전해 주고 있다. 이와 유사한 기록들이 제주를 다녀간 관리들의 저서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제주가 사면이 바다라는 지리적인 영향과 바람이 많은 기후적인 영향, 그리고 각종 진공(進貢)에 동원 돼 바다를 건너야했기 때문에 남자들의 해난 사고의 위험이 높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자연히 여다(女多)는 석다(石多), 풍다(風多), 한다(旱多), 마다(馬多)와 함께 5다(五多)의 한 범주로써 회자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돌아오지 못한 영혼을 기리기 위해 헛묘를 만드는 풍습이 전래되고 있고, 해안가 높은 지대나 고향 마을 어귀에 표해비를 세운 것을 볼 수 있다.


이수광(李粹光·1563~1629)의 ‘지봉유설(芝峯類說)-제국부·외국(諸國部·外國)’조에 보면, 제주도의 매장방법이 관(棺)을 사용하였지만 화산에 의해 형성된 돌섬이다 보니 흙살이 깊지 않아 구덩이를 조그만 파서(略掘) 겨우 시신을 매장한 모습을 적어놓았다. “제주에는 흙의 깊이가 3척(尺) 되는 곳이 없다. 그런 까닭에 매년 한재(旱災)로 고통을 받으며, 항상 육지의 고을에서 곡식을 사들여 생활한다.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것도 관(棺)이 반은 땅 위에 드러나 있다고 한다.”


여다(女多)에 대한 기록은 제주에 죄인으로 왔다가 다시 복권돼 제주 목사로 부임하는 곡절을 겪었던 정헌(靜軒) 조정철(趙貞喆‘1751~1831)의 저서 ‘정헌영해처감록(靜軒瀛海處坎錄)’이 눈길을 끈다.〈탐라잡영(耽羅雜詠)> ‘其十六’에 남소여다(男少女多)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탐라는 멀리 바다 한가운데 있어서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 것이 예부터 변함이 없고, 테우리(牧子)나 농부가 오막살이에 살아도 부인과 첩을 거느리는 것이 풍습처럼 되었다. 당시 제주의 인구는 남자 5만여 명, 여자는 7만여 명(耽羅遙在海之中 男少女多古今 同牧子田圭丁蔀 屋下一妻一妾自成風 時男口爲五萬餘 女口爲七萬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