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김씨 4세 김자신의 묘. 고려시대 방묘.

▲밭머리에 무덤 조성 16세기 이후
위의 내용은 일제 강점기의 한학자 진재(震齋) 이응호(李膺鎬·1871~1950)의 기록을 보면, “밭머리에 무덤을 만든다(田頭起墳). 읍지(邑誌)에 의하면, 풍수지리를 쓰지 않고 대강 밭머리를 파서 무덤을 이뤘다. 상고하건데 옛날 방묘(方墓)와 원묘(圓墓)가 여기 저기 있으나 별로 밭머리에 붙인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무뢰배(無賴輩)가 발(發)한 것인가?”라고 했다. 


진재에 의하면, 옛날에는 밭머리에 방묘와 원묘를 쓴 곳이 없다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묘지 형식인 방묘와 조선 초기까지 유행한 원묘(제주에는 간혹 조선중기에도 나타난다)는 밭머리에 있는 것이 없고 주로 산야(山野)에 조성된 것이 많다는 말이다. 그의 이 기록은 밭머리에 무덤을 쓰는 풍습이 적어도 조선시대에 국한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밭머리에 분묘를 일으키는 것을 무뢰배의 소행쯤으로 생각하고 있어 전두기분(田頭起墳)의 장법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도 밭머리에 무덤을 쓰는 것은 16세기 이후이고 국영목장이 확장되면서 마소가 많아지고 차차 밭에 무덤 쓰는 것이 확산되었다고 생각한다. 원래 산담의 기능에서 보건데, 산담의 제일 중요한 기능은 봉분을 마소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처음 무덤은 마소가 드나드는 목장의 산야에 조성되었으며, 아니면 원래 산야에 조성됐다가 후에 목장으로 귀속되다보니 산담이 필요해서 쌓은 것이다. 또 그 산야나 목장에서는 화전(火田) 경작이 있었기 때문에 그냥 봉분만을 조성하게 되면 들불이 번져 무덤의 영역을 태우기 때문에 산담을 둘러 봉분을 보호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밭에 무덤이 조성된 것이 많이 보이지만 그 무덤은 모두가 원래부터 밭에 조성한 것은 아니었다. 여말 선초에 입도한 입도조 무덤들이 주로 방묘로써 현재에도 산야에 있는 것을 보면, 조선시대의 무덤은 목장 조성과 관계가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부터 무덤의 장소는 밭머리가 아닌 들판이었으나 인구가 늘어나면서 곡식이 부족하여 산야가 점점 밭으로 개간되면서 산담이 있는 무덤들이 밭 가운데에 있게 된 것이다. 처음부터 무덤을 밭에 조성했다면 마소의 침입을 일차적으로 밭담이 막아주는데 굳이 밭 속에 다시 산담을 조성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후대에 와서 밭의 무덤에 산담을 두르는 것은 애초에 마소와 들불의 침입을 막는 기능을 넘어서 무덤 소유권의 경계 표시이자 하나의 사회적 의례의 형식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무덤하면 으레 산담을 둘러야 하는 것을 효의 근본으로 생각하게 된 사회적 관념 때문이다.   총체적으로 보면, 제주의 장법은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가난으로 인한 고려장의 장법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 또한 육지의 관료들은 또 나병환자의 병이 옮을까 두려워 시신에게 가까이 가지 못해 그냥 방치하는 것이 학장(壑葬)으로 오해될 수 있었고, 극심한 가뭄에 의한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상태에서 시신 방치라는 풍장(風葬)처럼 비치는 요소도 찾을 수 있었다.

   
▲ 산 속에 조성된 외담 산담.

그러나 이 두 가지 요소는 제주민의 일반적인 장법이 아니라 상황적으로 발생한 시대적 특수성에 의한 장법들이다. 왜냐하면 학장이나 풍장과도 같은 시신의 방치는 물의 오염이나 전염병을 유발시켜 한 사회를 붕괴시킬 수 있는 위험이 다분히 있고, 또한 유교의 예사상을 통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있는 조선의 체제상 기본적으로 매장 중심의 장법을 권장한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제주의 장법은 분명 관곽을 이용한 매장이 확실하며, 경제적 능력이 없는 가난한 서민들에게 있어서는 그 형식이 단지 관곽을 쓰지 않고 ‘땅을 조금 파서 묻는 약식장례(略掘葬)’ 가 당시 사회·경제적 조건에서 공공연하게 행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봉분이 작고 외담으로 간단하게 쌓은 산담들은 오늘날까지 ‘가남이 없는 자’나 가까운 친족이 없는 사람들의 무덤으로 알려졌으며, 이런 형식이 어쩌면 초기 산담의 원형인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상 외담의 산담은 경제적인 여유가 없거나 방계 가족이어서 무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산담인데 이때는 무덤의 표시 기능이 더 강하며, 공동체의 측은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인간애의 산물로 이해된다.


또한 제주의 야산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석축 봉토로 된 작은 방형 무덤들도 묘비가 없는 관계로 어느 시기인 것인지는 모르나 형태로 보아 고형(古形)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어 이 석축 방묘를 새롭게 풀어야 하는 과제가 있다.


▲외담, ‘가남’이 없는 사람 산담
1901년 제주를 방문한 독일인 지그프리트 겐테(Siegfroied Genthe·1870~1904)는 제주 기행의 첫 인상은 그리 기분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는 현무암의 돌담에 놀라면서 돌로 튼튼하게 쌓은 성벽을 해적 소굴처럼 보인다고 하여 산담의 인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해발 500미터 정도가 되면 들판은 사라지고 수많은 무덤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들판과 마찬가지로 무덤마다 검은 현무암 돌로 높이 울타리를 둘러놓았다. 섬에 도착했을 때 썩 반갑지 않은 인상을 주었던 현무암 무더기는 높은 산에서도 여전히 같은 분위기였다. 지난 세기 초(19세기) 만하더라도 섬에 사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풍습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죽은 사람을 그냥 뗏목 위에 실어 먼 바다에 띄워 보내어 바람과 파도에 내맡겼다. 오늘날 일본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특정의 불교 풍습을 상기시키는 이런 괴이할 정도로 환상적인 이 풍습 대신, 근세에 매장 풍습이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 어떤 영향 때문인지 들은 바 없다.”


위의 겐테의 말을 되짚어보면, 19세기 초까지 제주에 수장(水葬)이 행해지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 겐테가 생각하는 제주의 수장설(水葬說)은 아마도 겐테가  당시 조선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가 부족한데서 기인하는 오해인 것 같다. 사실, 겐테의 생각과는 달리 조선의 유교식 매장 습속은 이미 조선 개국 초에 시작되어, 18세기에 이르면 민간에까지‘상례비요(喪禮備要)’, ‘가례집람(家禮集覽)’이 보급될 정도로 유교식 상·장례가 실생활에 보편화 되어 너나없이 모두가 매장풍속을 따르고 있었다.